“올해가 가기 전에 모이자.” 정해진 약속처럼 서로 날을 맞추고 장소와 음식을 고르는 연말이다. 마스크 쓰던 시절 따위 없었던 것처럼 맨얼굴로 모이는 날들이 익숙해졌지만 식탁 위 치킨이나 보쌈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낯설어진다. 동물 없는 끼니가 누적될수록 고기에 부재했던 동물의 존재가 선명해진다. 내게도 한때 음식이었고 일상이었던 동물의 조각들.
채식하는 사람이 불편함을 준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내가 불편해지는 쪽을 택하다보니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한때 살아 있었던 동물과 동물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나라는 사람이. 평소에도 많이 먹는 고기를 굳이 내 앞에서까지 편하게 먹도록 ‘배려’했다. 아니, 배려했다고 생각했다. 다수의 편의를 위해 소수가 참는 행위를 배려라고 볼 수 있을까?
고기 한 점의 대가로 얼마나 많은 피와 분변이 흘러드는지 안다. 매년 3억t이 넘는 육류, 1.7억t의 수산물을 생산하는 거대한 산업이 생태계 파괴를 넘어 인류의 건강과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인 걸 안다. 그럼에도 몇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육식주의에 순응했다. 2022년 한국의 육류 소비가 최초로 쌀 소비보다 많았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육류 소비 증가와 쌀 소비 감소가 이어진다고 내다봤다. 한국에서만 1초에 축산동물 35명이 도살된다.
누군가는 비건을 극단적이라지만 순서가 거꾸로다. 극단적인 육식주의 때문에 비건을 택한다. 채식주의는 산업혁명 이후, 어찌 보면 먹고살 만해진 시대부터 확산됐다고 볼 수 있다. 배가 부르고 나서야 다른 가치와 존재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요구되는 윤리와 권리는 시대마다 달라졌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고기는 특별한 날에만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매일같이 동물이 들어간 식사를 한다. 간식으로도 먹는다. 생존이 아니라 맛을 위해 먹는다. 혀가 즐거우려고 이렇게까지 고통을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많이 태어나게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많이 죽이지 않았다면, 어쩌면 비건을 선언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팬데믹 종식을 선언한 2023년의 끝자락,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식탁을 마주할 때마다 무기력해지지만 우리 집에 사람들을 초대할 때만큼은 미리 만든 초대장을 보낸다. 논비건 음식이나 제품 입장 금지, 논비건 사람은 환영한다는 내용이다. 선물 또한 받지 않는다. 물건을 최소한으로 소비하고 싶어서다. 이 집에서 함께하는 순간만이라도 (비교적) 탈자본적이고 탈인간적인 경험을 하기 바라며 제철 채소가 가득 들어간 요리를 준비한다. 겨울이면 무와 배추를 가득 넣고 채소전골을 끓이는데, 깊고 시원한 국물맛에 다들 놀란다. 곤약을 넣으면 탱글탱글한 식감이 겨울 채소와 아주 잘 어울린다. 평화로운 재료들이 따끈한 국물 속에서 포근하고 맑게 어우러진다.
가끔 제멋대로 선물이나 논비건 음식과 함께 입장하는 손님도 있었다. 내가 사용하는 그릇에 어묵과 달걀이, 동물 학대의 흔적이 묻는 것이 꺼림칙했지만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한 적은 없다. 즐거운 경험으로 남겨주고 싶다는 생각과 알려줄 건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의 승부가 아직 나지 않았다. 고기와 선물 없는 모임이 더 확장되길 바라며 모두가 떠난 뒤 빡빡 설거지할 뿐이다.
글·그림 초식마녀 비건 유튜버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남을 살리는 밥상으로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4주마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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