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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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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받는 농부의 일은 장마에도 멈추지 않는다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보며 밀·보리·호밀 씨앗을 까면서 ‘나눌’ 준비를 하다
등록 2023-07-15 13:40 수정 2023-07-17 18:26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가 다양한 밀 씨앗을 털며 연구 중이다.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가 다양한 밀 씨앗을 털며 연구 중이다.

장마다. 집 앞 밭에 할 일이 많지만, 어쩔 수 없이 집에 있어야 하는 시기다. 대부분 농부가 쉬는 기간이다. 하지만 씨앗 받는 농부의 일은 멈추지 않는다. 그동안 못했던 사무와 집안일을 하며 장마 전에 수확한 작물을 정리한다. 먼저 비가 오기 전에 감자를 캔다. 서늘한 것을 좋아하는 감자는 하지가 지나면 뜨거운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썩는다. 그 옆에 심어 감자에 질소를 제공하던 키작은 강낭콩도 수확한다. 빨간색, 검은색, 흰색 바탕의 알록달록 천연 무늬의 강낭콩이다. 초봄에 박은 장다리무도 어느덧 씨앗이 여물어 베어냈다.

홍감자, 자주감자… 여러 색과 모양의 감자를 캐냈다. 감자는 상처가 난 것은 금방 무르기 때문에 관리가 중요하다. 상처 난 부분을 도려내고 물에 넣어 보관하면 전체가 썩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혹은 썩은 것을 따로 모아 감자전분을 만들거나, 미생물을 증식시켜 밭에 영양분으로 줄 수도 있다.강낭콩은 그럭저럭 까는데 무씨가 까다롭다. 무 꼬투리를 하나하나 뜯어내서 까야 한다. 진딧물이 달라붙어서인지 멀쩡한 씨앗보다 빈 꼬투리가 더 많다. 모래알 같은 갈색 모양의 무씨. 장다리 하나에 꽤 많은 씨앗이 달린다. 무씨 하나를 심으면 큰 무 하나가 나오는데, 생각해보면 엄청난 씨앗 양이다.

그냥 까면 재미없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까는 재미가 있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며 장난감 만지듯이 씨앗을 하나씩 깐다. 아무 생각 없이 빗소리를 들으며 씨앗을 까고 있자면, 새삼 여유롭고 평화롭다.

장마 이전엔 ‘은은가’(토종씨드림 사무국)에서 밀, 보리, 호밀 씨앗을 털었다. 지난 초겨울에 심었던 것들이 겨울에 싹을 내어 추위를 견디고 봄을 지나 이젠 수확한다. 밀 30여 종, 보리 10종, 호밀 1종을 털었다. 다양한 지역에서 수집한 씨들은 길이, 모양, 색깔, 까락(수염) 유무가 다 다르다. 지역마다 자라는 밀과 보리가 다르니 지역마다 만드는 부침개나 빵의 맛도 다르지 않았을까.

고무신을 신고 밀과 보리를 사정없이 발로 비빈다. 기계로 하면 간단하지만, 기계를 돌릴 공간이 마땅치 않다. 발로 하나씩 차근차근 빠진 곳은 없는지 확인하며 비빈다. 갈색 알이 톡톡톡 빠져나온다. 밀, 보리, 호밀의 씨앗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생겼다. 밀은 넓적하고, 보리는 입체적으로 생겼다. 호밀은 씨앗이 깊고 빼곡히 들어가 있어 빼내기가 가장 어렵다.

이렇게 씨앗을 많이 받는 이유는 나누기 위해서다. 씨앗의 전제는 나눔이다. 퍼뜨림이다. 하나를 파종하면 그 이상의 것이 나온다. 혼자 갖기엔 너무 많아 씨앗을 나눈다. 씨앗 받는 할머니들의 푸짐한 인심은 어쩌면 이 씨앗을 나누는 문화에서 오지 않았을까.

토종씨드림은 전국 회원들에게 매년 2월과 7월에 봄·가을 작물 씨앗을 나눈다. 은은가에선 매년 200종이 넘는 씨앗을 채종해 나눈다. 전국에 있는 토종씨앗 모임에서 개인 회원이 소중히 털어낸 씨앗을 보내주신다.

종종 ‘토종씨앗을 사고 싶어요’ 하는 분들이 있다. 돈으로 산다는 건 그 씨앗을 온전히 소유한다는 것인데, 씨앗은 그럴 수 없다. 씨앗은 모두의 것이기에 ‘나눈다’는 원칙을 지금까지 고수해오고 있다. 토종씨앗의 가치를 알고, 소중히 여기며, 다시 더 많은 사람에게 보낼 이에게 씨앗을 보낸다. 비 오는 날에도 열심히 씨앗을 받는 이유다.

글·사진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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