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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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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자꾸 멕여야지” 텃밭 동무와 막걸리 기울이며

감자·배추와 헤어질 결심 뒤, 잎채소에 마음을 또 빼앗기네
등록 2023-04-28 12:51 수정 2023-05-05 06:21
2023년 4월15일 잎채소 모종을 심는 새, 텃밭 동무가 밭 곁 언덕에 올라 지난해 씨를 뿌린 더덕·미나리 새순을 살피고 있다.

2023년 4월15일 잎채소 모종을 심는 새, 텃밭 동무가 밭 곁 언덕에 올라 지난해 씨를 뿌린 더덕·미나리 새순을 살피고 있다.

겨우내 쉰 밭에 거름을 내고 나면, 으레 감자를 먼저 심는다. 대체로 3월 말께, 봄 농사 시작을 알리는 의례다. 올해는 감자를 내지 않았다. 지난해 씨감자를 욕심껏 잔뜩 넣었다가, 수확기에 만난 녀석들이 모조리 오종종했던 탓이다. 밭흙이 아직 그냥저냥이어서 그런 것 같다.

2012년 봄 <한겨레21>은 ‘도시농업’을 특집 기사로 다뤘다. 구경만 하려 따라나선 서울 은평구 북한산 자락 주말농장은 의상봉과 원효봉을 끼고 있어 웅장했다. 경치에 반해 덜컥 5평 텃밭 살이를 시작했다. 북한산 텃밭이 문을 닫으면서 경기도 고양시 벽제 언저리와 선유동을 거쳐 3년 전 한국항공대학교에 가까운 덕양구 현천동 난점마을로 옮겨왔다. 처음 뭉쳤던 회사 동료들과 중간에 합세한 고양시 도시농업네트워크 출신 ‘엘리트 도시농부’ 친구들까지 모두 8명으로 불어났다. ‘자영농’을 선호하는 2명을 뺀 6명은 20개 남짓한 고랑을 함께 일군다.

텃밭을 시작하고 맨 먼저 달라진 건 ‘김장 독립’이다. 따님만 다섯 분인 처갓집에선 해마다 김장철이면 1박2일 ‘집단 노역’을 했다. 다섯 사위가 다 열심일 순 없으니, 착한 셋째와 어리바리 막내가 ‘일받이’였다. 아이 2명은 들어갈 정도로 넉넉한 진홍색 ‘다라이’ 가득 무채를 내, 200포기 넘는 배추를 버무렸다. 때마다 사나흘 앓아누웠다. 텃밭에서 직접 키운 배추는 ‘따로 김장할 권리’를 주장할 최고의 명분이 돼줬다. 막내가 ‘독립’한 뒤에도 셋째는 한참을 더 노역했다.

지난해 김장 땐 처음으로 전남 해남산 절임배추를 썼다. 8월 말 모종한 배추는 ‘종합비타민’(복합비료, 텃밭 2년차부터 유기농에서 무농약으로 갈아탔다) 덕에 9월까지 맹렬한 기세로 자라 흐뭇함을 안겼다. 한데 날이 서늘해지면서 해높이가 낮아졌다. 배추가 받아야 할 햇볕을 주변 나무가 포식했다. 속 찬 배추가 몇 되지 않았다. 올가을엔 배추 모종도 내지 않기로 했다.

감자·배추와 헤어질 결심을 한 뒤, 지난해 데면데면했던 열매채소에 집중하기로 했다. 비 맞아가며 모종 사러 간 날, “날씨 보니 일주일 뒤 심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헛걸음으로 돌아서려는데, 비 맞아 반짝이는 잎채소에 눈길이 갔다. 이미 두 고랑이나 각종 잎채소를 심었는데, 방글방글 웃는 모종한테 또 맘을 뺏겼다. 봄마다 이 모양이다. 못 이기고 30개짜리 한 판을 데려와 한 고랑 더 심었다. 꽃보다 예쁘다. 인천 계양구의 농사꾼은 상추의 성수기를 ‘지옥’으로 불렀지만, 삶아서 꼭 짜 된장으로 무치면 상추 한 상자는 금방 먹는다.

“형, 더덕이 많이 나왔네~.” 어느새 비는 그치고, 지난해 밭 곁 언덕 한쪽에 뿌린 더덕과 도라지의 새순을 발견한 텃밭 동무 목소리가 낭랑하다. 금세 두어 뭉치 뜯은 쑥을 집으로 데려왔다. 남해산 다시마 다섯 쪽, 강원도 인제 용대리산 황태 대가리 두 개를 넣고 국물을 냈다. 한살림표 두부를 곁들여 국을 끓이니, 은은한 쑥향이 막걸리를 부른다. 동무와 잔 들며, 영화 <웰컴 투 동막골> 촌장님 명대사를 떠올린다. “뭘 자꾸 멕여야지.” 생계형 도시농부 텃밭이 그렇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농사꾼들’에 도시 텃밭 10년차 정인환 기자가 합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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