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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형의 실패’ 그 너머의 이야기

등록 2022-05-31 07:19 수정 2022-06-01 01:15
1415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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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어느 여름날이었던 것 같다. 동네 카페에 노트북을 펴고 일하려던 참인데, 갑자기 주변이 왁자지껄 소란스러웠다. 50~60대로 보이는 한 무리의 중년 남녀들이 큰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중 홀로 양복을 빼입은 남성이 노트북을 열더니 뭔가를 열심히 설명했다. 노트북 화면에 가격변동 차트를 띄운 거로 봐선, 투자법을 가르치는 눈치였다. 처음에는 다단계 영업인가 싶었다. 앉은 이들의 연령대로 보나, 옷매무새로 보나 무슨 대단한 투자 비밀을 알려줄 리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들려오는 단어들이 생경했다. 비트코인이 어쩌고, 가상자산이 어쩌고, 블록체인이 어쩌고. 귀 기울여보니 이날의 강의 주제는 비트코인 투자법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마을버스 앞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의 입에서 또 ‘비트코인’이란 단어를 들었다. 강한 조선족 사투리를 쓰는 그는 휴대전화에 대고 큰 소리로 비트코인에 투자했다가 얼마를 벌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누군가에게 투자를 권유하고 있었다. 아, 나만 빼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비트코인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현실을 그제야 자각했다. 이제 2030 트렌드가 아니라, 5060 트렌드도 못 따라가는 신세가 됐구나. 그때 처음으로 비트코인 투자 열풍이 누구에게서 출발해, 어디로 갈지 궁금해졌다.

사실 비트코인은커녕 주식투자도 한 번 해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처음에는 고지식해서, 그다음에는 게을러서. 아마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 같다.(물론 돈에 초연해서는 아니다.) 투자는커녕 로또 한 번 사본 적이 없다. 내게 허락된 행운의 기운이 있다면, 로또 당첨 말고 다른 곳에 그 기운을 쓰고 싶다.(<한겨레21>이 <뉴요커> 같은 잡지가 되게 해주세요, 라든가.)

최근 코인 ‘루나’ 가격 폭락 사태를 지켜보면서도, 몇 년 전 그 어느 여름날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어떻게 한 개에 14만원 하던 코인이 한 달 만에 갑자기 0.1원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50조원 규모의 시가총액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너머 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루나, UST, 테라, 스테이블코인, 탈중앙화금융(DeFi)… 온통 암호 같은 용어가 쏟아져나왔다. 루나를 만든 블록체인 기업 테라폼랩스 권도형 대표가 트위터에서 조롱했듯이 ‘탈중앙화 개념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멍청한’ 일반인인 것인가.

이번호를 꼼꼼하게 읽으면 ‘멍청함’은 면할 수 있다. 이경미 기자가 전세계 가상자산(암호화폐) 시장을 흔드는 루나 가격 폭락 사태와 다양한 가상자산에 투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폈다. 이 기자가 지적했듯이 “대체로 그들은 도박인 줄 알면서도, 한번 시작하면 폐인이 되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머니게임에 뛰어들었다”. 권도형 대표를 두 차례 인터뷰했던 김동환 전 <코인데스크코리아> 기자가 루나 사태의 근본 원인도 짚었다. 권 대표를 찾아 테라폼랩스 사무실이 있는 싱가포르까지 달려간 곽진산 <한겨레> 사회부 기자의 취재기도 싣는다.

금융정보분석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1년 하반기 가상자산을 이용한 사람 가운데 2030세대가 55%였다. 당장 손에 쥔 자산이 많지 않아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가 쉽지 않은 2030세대에게, 비록 고위험일지라도 적은 투자로 ‘대박’을 꿈꿀 수 있는 암호화폐는 로또처럼 여겨졌을 테다. 이들은 ‘노오오오력’을 하라는 사회의 압박 속에 자랐다. 그래서 더욱더 계층 상승의 좁은 문(입학·취업·승진 시험 등등)을 통과하려 안간힘을 쓴다. 그 노력에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할까봐 절차의 공정에 더 민감해진다. 그러면서도 노력만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잘 알기에 다른 한편으로 루나라는 신기루를 좇아 더욱더 투자에 매달린다.

달(루나·Luna)을 좇는 욕망이 쌓아올린 탑이 서 있는 땅(테라·Terra), 즉 가상자산 투자에 열광하는 한국 사회의 밑바닥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유다. 권도형 대표 개인의 실패 혹은 사기, 이를 막지 못한 정부 규제의 미비로만 지금의 루나 사태를 설명할 수 없다. 저 너머의 세상, 그 너머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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