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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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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시간의 충돌

등록 2022-02-24 17:52 수정 2022-02-25 02:25
1401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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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주의자였다. 결혼과 출산은 걸림돌이 될 것만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 더구나 잘해내려면 가정 대신 일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장 회사만 둘러봐도 아이를 키우며 기자로서의 경력도 탄탄하게 쌓아나가는 여성 선배는 드물어 보였다. 기자 중에 여성이 적을뿐더러 결혼하고 출산한 여성 기자 자체도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었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끝까지 비혼주의자로 남았을 것이다. 일 때문에 결혼하지 않겠다는 딸에게 엄마는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내가 키워줄 테니까 너는 하고 싶은 일 다 하면서 살라”고 했다. 자신은 평생 하고 싶은 일 못하고 살았으면서 딸을 위해 계속 희생하겠다는 엄마가 고맙고 또 미안해서, 한참 동안 펑펑 울었다. 그리고 엄마는 10년 넘게 그 약속을 지켜주고 계신다. 그 덕분에 나는 여전히 좋아하는 일을 하며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

엄마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는데도 회사일과 집안일을 저글링하며 사는 하루하루가 만만치는 않다. 하루는 24시간뿐이라 항상 시간에 쫓긴다. 아침에 출근한 뒤 꼬박 17시간 넘게 컴퓨터 모니터만 노려보며 잠깐 일어날 틈도 없이 바쁜, 오늘 같은 마감날에도 틈틈이 아이 학원 일정과 숙제를 챙겨야 했다. 코로나19 유행 이후로는 돌발 상황이 너무 자주 일어나 근무 중에도 챙겨야 하는 집안일이 늘어났다. 일과 돌봄 사이의 긴장관계가 팽팽해지다 못해 어떤 날은 터져버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분노의 화살은 남편을 향한다. “왜 항상 엄마만 아이 학교, 학원을 챙겨야 하냐”고, “똑같이 바쁜데 왜 가사노동은 공평하게 나누지 않냐”고 따진다. 아무리 각자 역할을 정해봐도 학교와 학원에서는 젠더 규범에 따라 계속 엄마한테만 연락하고, 아이는 급한 일이 생기면 엄마부터 찾는다. 일의 시간과 가정의 시간은 끊임없이 충돌한다. 이번호 표지이야기 ‘48시간 가사노동 기록’에 참여한 부부 아홉 쌍의 갈등, 한숨, 답답함은 바로 내 이야기이기도 했다.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은 뿌리 깊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곳곳에서 드러내는데, 가사노동 부담 특히 돌봄 문제도 그중 하나다. ‘코로나19 시기에 미취학 아동이나 학령기 아동이 있는 대부분의 부모에게 가정에서의 시간 부담이 압도적으로 증가했다. 모두가 집에서 더 힘들게 일했다. 방해 없이 직장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급격히 줄었다.’ ‘젊은 엄마들은 문서 작업을 하고, 논문을 쓰고, 보고서를 준비하는 와중에 온라인수업을 듣는 아이가 덧셈과 뺄셈을 배우는 것까지 챙겨야 하면서, 안 그래도 위태롭던 커리어(경력) 사다리에서 더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어야 했다.’ 한국 이야기 같지만, 미국 이야기다. 하버드대학 경제학 교수인 클라우디아 골딘이 <커리어 그리고 가정: 평등을 향한 여성들의 기나긴 여정>에 쓴 한 대목이다.

이런데도 ‘육아기 재택근무 보장’이 무슨 대단한 시혜인 것처럼 착각하는 대선 후보도 있다. 그 후보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구조적인 차별은 없다”고도 말했다. 그런 사람에게 가사노동, 돌봄을 둘러싼 남편과 아내 사이 갈등은 공평하게 분담하지 않은 “개인적인 문제”로만 여겨질 것이다. 골딘은 데이터 분석으로 왜 이것이 ‘구조적 차별’인지를 밝혀냈다. 100여 년간 미국 대졸 여성들을 다섯 세대로 나눠 성별 임금 격차를 추적해 “남녀 간 소득 격차는 커리어 격차의 결과이고, 커리어 격차는 부부간 공평성이 깨지는 데서 비롯”되며 “돌봄은 여성의 커리어 실현과 부부간 공평성의 달성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증명했다.

우리는 독자들과 함께 이를 증명해보고 싶었다. 아홉 쌍의 부부가 48시간 동안 가사노동을 기록하는 실험에 동참해줬다. ‘억울한 부부, 연락주세요’라는 기사를 보고 응모한 독자는 더 많았다. 일상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를 원하는 독자가 많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김선식 기자와 박다해 기자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왜 이것이 ‘구조적 차별’인지를 짚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독자와 함께 고민하고 호흡하는 기사를 계속 써보고 싶다. 좋은 아이디어를 기다린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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