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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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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침묵하는 시간

등록 2022-02-08 15:05 수정 2022-02-09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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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 지옥 같은 시간이 시작’되면, ‘열기에 자극받아 띠처럼 무리를 지어 길을 가로지르는 검은 개미 떼, 그리고 공기의 흐름에 따라 높이 떠 선회하는 꼬리 없는 독수리를 제외하고 어떠한 살아 있는 생물체도 이 시간에는 움직이지 않는다’. 조지 오웰은 그의 첫 번째 소설 <버마 시절>에서 미얀마(버마)의 작열하는 햇볕, 맹렬한 더위를 이렇게 묘사했다. 미얀마의 여름 한낮 최고기온은 40도에 육박한다. 버마인들은 이 지옥 같은 때를 ‘발이 침묵을 지키는 시간’이라고 불렀다. 소설의 무대는 영국 식민지였던 버마의 카우크타다라는 한 읍이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발조차 침묵하는 시간을 조지 오웰은 버마에서 직접 경험했다. 19살이던 1922년부터 5년간의 버마 시절에 그는 인도 제국주의 경찰이었다. 영국의 식민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제국주의 경찰. 1948년 영국에서 독립한 버마는 1989년 미얀마로 국가명을 바꿨다.

‘침묵을 지키는 시간’이 다시 미얀마에 흘렀다. 조지 오웰의 ‘버마 시절’로부터 꼭 100년이 흐른 2022년 2월1일 화요일, 미얀마 최대 상업도시인 양곤에서, 제2도시인 만달레이에서, 최북단 카친주의 미치나에서 시민들은 밖으로 발을 내딛지 않았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거리는 텅 비었다. 겨울이어서 이날 양곤의 최고기온은 30도(!)에 그쳤는데도, 사람들은 “출근도 외출도 장사도” 하지 않았다. 이날은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지 꼭 1년이 된 날. 미얀마 국민은 ‘침묵’ 시위에 동참함으로써 군부에 저항했다. 맹렬한 더위는 없더라도, 군부에 1513명이 목숨을 잃고 1만2천여 명이 체포된 1년의 하루하루는 지옥이었으므로. 군부가 반테러법을 적용하고 기업인의 자산을 몰수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침묵이 경고의 말보다 강했다.

<한겨레21>은 ‘침묵을 지키는’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미얀마 민주화운동 1년을 돌아보는 표지이야기를 준비했다. 독립언론 매체 <미얀마 보도사진 통신사>(MPA) 소속 현지 기자 3명이 시민방위군 저격수가 된 여행가이드, 탯줄 묻은 땅을 떠나 국경지대 곳곳에 흩어져 유랑생활을 하는 피란민들, 시민불복종운동에 동참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보내왔다. 조일준 기자가 미얀마 군부 쿠데타 뒤 1년의 시간과 남겨진 과제 등을 짚었다.

그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끈질기게 미얀마를 이야기했다. 2021년 12월까지 한국과 미얀마 시민이 함께 쓰는 ‘미얀마 연대’(#Stand_with_Myanmar) 코너를 연재했다. 미얀마 시민에게 보내는 한국 시민의 지지와 응원의 글을 미얀마어로 번역해 실었다. 미얀마 시민방위군 대원, 성소수자로서 민주화운동에 동참한 작가 등에게 직접 글을 받아 한국어로 소개했다. ‘미얀마 연대’ 연재와 이번호 현장 르포까지 글을 섭외하고 번역해준 최진배 <미얀마 투데이> 대표에게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는 “미얀마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지옥이 돼버렸다”고 아파하면서도, 쿠데타 이후 1년이 지난 지금 “미얀마 사람 한두 명이 목숨을 잃는 게 뉴스가 되지 않는 서글픈 시절”에도 “전선에서 싸우는 청년, 포탄과 총탄에 찢겨 다치고 숨지는 민중,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로 나서 구호를 외치는 평범한 사람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계속 전하겠다”고 했다.

아예더봉 아웅야미!(혁명은 승리한다!) 그동안 미얀마에 계속 관심을 가져줘 ‘고맙다’며 <한겨레21> 페이스북 계정에 미얀마어로 댓글을 남겨준 미얀마 시민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인사를 남긴다. 우리의 미약한 글이 그곳에서 침묵을 버텨내는 작은 힘이라도 되길 바란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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