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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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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이지 않아도

등록 2021-12-28 17:24 수정 2021-12-29 11:23
1394호 표지이미지

1394호 표지이미지

<한겨레21> 뉴스룸의 달력은 세상보다 2주를 앞서간다.

눈 밝은 독자라면 이미 알겠지만, <21> 표지 왼쪽 하단에는 잡지 발행일이 찍혀 있다. 배송 일정 등을 고려해 독자가 잡지를 받아 보는 그다음 주 월요일에 해당하는 날짜를 적어둔다. 2022.1.3. 그러니까 2021년 12월24일 새벽 1시에 쓰는 이 칼럼이 실릴 잡지는 2022년 1월3일자로 발행되는 셈이다.

그렇게 지난주 제1393호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을 2021년 송년호로 발행했고, 이번주 제1394호 ‘빛나지 않는다는 너에게’를 2022년 신년호로 내놓는다. 신년호라는 ‘띠’를 두르긴 했지만, 독자가(기자들 역시) 살아가는 호흡에 맞추자면 이번호가 사실상의 송년호다. 출판사진부에서 2021년을 대표하는 ‘열두 장면’을 뽑아 소개했는데 코로나19와 기후위기, 전쟁 등에 고통받는 이들이 주인공이다. 달력의 숫자는 분명 2022로 바뀌는데도 1년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어쩌면 더 나빠진 세밑이다.

그래도 연말이고 새해니까 ‘반짝반짝’ 빛나는 표지를 만들어봤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밤에 찍은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수도권은 불빛으로 휘황찬란한데 인구가 적은 지역은 어두컴컴하거나 불빛이 희미하다. 이 한 장의 사진은 상징적이다. 김선식 기자가 표지이야기에 썼듯이 “깜깜해도 오래 보면 보인다”. <21>은 지난 4개월간 ‘소멸도시 리포트’ 심층기획보도를 이어왔다. 수도권과 대도시에 집중된 보도, 지방소멸이나 쇠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어로만 채워진 보도를 넘어서기 위해 기자들이 길게는 열흘씩 ‘빛나지 않는다’고 말해지는 지역에 머물며 오래 보고 그곳에 사는 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기록했다. 소멸도시 리포트의 마지막 편으로, 행정안전부가 지정한 인구감소지역 89곳에 사는 만 19~64살 600명에게 36개 문항을 묻고, 그중에서도 2030세대 8명에 대한 표적집단면접조사(FGI)를 진행했다.

‘보이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은 <21>이 창간 이후 27년째 꿋꿋하게 지켜온 가치다. 지난호에 이어 이번호에도 연속해 싣는 ‘페미사이드’(여성살해) 심층기획보도 역시 범죄통계나 판결문에서는 보이지 않는 여성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성폭행당한 뒤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려 세상을 등진 피해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살아남아 자신의 목소리를 찾은 생존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21> 편집장이 되고 나서 100여 일 동안 모두 3편의 심층기획보도를 연재했다. ‘무연고 사망자 1216명 심층리포트’ ‘소멸도시 리포트’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등 각각 얇은 단행본 한 권은 됨직한, 촘촘하고 깊이 있는 보도를 하기 위해 기자들 모두 애썼다.

좋은 기사, 좋은 기획이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여전히 믿는다. 지난호에 나간 페미사이드 기획기사에 대해 과분한 응원과 격려를 받았다. ‘안전 이별’을 위한 선택지를 제시한 페미사이드 특별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는 트위터에서 10만 건 넘게 리트위트됐다. 독자가 직접 참여해서 반응을 이끌어내는 인터랙티브 형식의 콘텐츠 실험이 독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보도가 중심이 되는 정보 저널리즘에서는 유용한 정보를 빠르게 얻고 싶다는 ‘속도감’이 중요하다면, 기획이 중심이 되는 내러티브 저널리즘에서는 기자가 작가의 역할을 하면서 ‘완독성’에 중요한 가치를 둔다.”(장윤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21>이 2021년 연재한 세 편의 심층기획보도, 이번주 <실직도시>라는 단행본으로 재탄생한 방준호 기자의 2019년 <21> 표지이야기 ‘공장이 떠난 도시’ 등이 그런 좋은 저널리즘의 예로 기억되길 바란다.

새해에도 <21>은 ‘돋보이고 싶은 욕심’, 당장 반짝반짝하지만 휘발성이 강한 기사로 눈길을 끌겠다는 욕심은 버리고, 보이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좀더 나은 세상이 되도록 비춰주는 등불 같은 존재로 계속 독자 여러분의 곁에 서 있겠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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