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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나쁜 사람? 아픈 사람

제1388호
등록 : 2021-11-16 19:07 수정 : 2021-11-1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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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주관적 경험이기에 모두가 가장 힘든 상황이다. 그중에서도 정말 너무너무 어려운, 그분의 삶의 경험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참혹함이 느껴지는, 도저히 사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는 도대체 왜 이분이 다른 의사들도 많은데 하필 내게 오셨는지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스스로 되뇌면서 그분들과 힘겨운 치유의 여정을 함께한다. 이렇게 유달리 기억에 남는 환자들은 퇴원하실 때 내게 편지를 전하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20년 동안 받은 편지들을 꼬박꼬박 모아놓은 작은 상자가 어느새 가득 찼다.’

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그가 20년 동안 간직한 편지가 그렇듯이, 나도 2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유난히 오래도록 기억되는 사건 또는 사람이 있다. 이 글을 남긴 의사가 그랬다.

12월31일. 2018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오후 5시44분. 마지막 진료 환자였다. 그것도 예약되지 않은 환자였다. 양극성 정동장애(조울증) 환자인 그는 예전에 입원한 적이 있지만, 오랜 기간 치료받지 않다가 그날 갑자기 병원에 왔다. 상담하러 진료실에 들어온 환자가 흉기를 휘둘렀다. 놀란 의사는 진료실 밖으로 도망쳤다. 문 앞에 있던 간호사에게 “도망쳐”라고 소리쳤다. 간호사와 반대편으로 도망치면서도 두 번이나 간호사를 돌아봤다. 그러다가 뒤쫓아온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렸다. 의사는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2시간도 안 돼 끝내 숨졌다.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보건복지 분야를 담당하는 기자였던 나는 중증정신질환에 대해, 급성기치료에 대해, 안전하지 못한 진료 환경에 대해 취재했다. 그에게 치료받은 환자와 가족들이 조문 와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추모글을 올렸다. 그의 죽음 뒤에 의료진을 폭행하면 가중 처벌받는 내용 등을 담은 이른바 ‘임세원법’이 만들어졌다.

잔상은 충격 때문이 아니라 ‘어떤 말들’로 인해 남았다. “(이번 사건으로)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우려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선 안 된다.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모든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사회적 낙인 없이 적절한 정신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임세원 교수의 여동생이 말했다. 유족은 고인의 뜻을 따라 조의금 1억원을 대한정신건강재단에 기부했다. 임 교수의 책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는 “정신과 의사조차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사랑했던 환자를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임세원의 말과, 유족의 말과, 그때 취재했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의 말은 신기하게도 닮아 있었다. 한 의사는 말했다. “(조현병 환자 때문에) 경찰이 숨졌을 때도 ‘아픈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달라고 언론에 부탁했다. 환자들의 폭력은 ‘악’이 아니라 ‘병’이다. 아프기 때문에 생기는 범죄다.” 다른 의사들은 낙인, 배제, 차별을 염려했다. “정신질환자가 문제라는 프레임으로 몰아가면, 환자들이 낙인찍히고, 병원에 안 다니고 싶어 할까봐 걱정이다.” “치료를 잘 받으면 중증정신질환자라도 위험하지 않다. 정신과 치료에 대한 편견이 없어지고 문턱이 낮아져야 한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어떤 말들’도 들었다. 정신질환자 또는 정신장애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의료 측면에서 ‘치료 대상’(정신질환자)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지원받을 ‘권리를 가진 존재’(정신장애인)이기도 하다(신권철, <정신건강복지법 해설>). 내 안의 어떤 무의식적 편견을 그제야 깨달았다. 가정에서 격리시설로, 격리시설에서 다시 병원으로, 병원에서 다시 사회로. 역사적으로 정신장애인들의 공간은 변해왔다. 정신장애인이 사회로 나오면서 격리시설이나 병원에선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그제야 터져나왔다. 사회적 낙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에 대해, 너에 대해, 우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엄지원·신지민 기자가 정신장애를 겪는 당사자와 가족, 사회복지사, 전문의 등 15명에게 귀 기울였다. 이번호 <한겨레21>이라는 작은 상자에 그 이야기를 담는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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