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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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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포즈

등록 2021-09-11 11:01 수정 2021-09-13 02:29
1380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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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광고하는 <한겨레21> 계속 봐야 하나.’

스물넷, 당돌한 독자였습니다. 저런 도발적인 제목을 단 기사를 실은, 작은 진보 매체의 편집장이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공군 ‘차세대 전투기 도입 사업’이 한창이던 2002년의 일입니다. 미국 F-15K와 프랑스 라팔 전투기가 경쟁하며 국내 언론에 광고 물량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한겨레21>에도 여러 차례 전투기 광고가 실렸습니다. 저처럼 <한겨레21>에 항의하는 독자가 많았습니다. 실망은 애정의 크기에 비례하니까요. 모두가 <한겨레21>이라는 언론을 주목했고, 기대했고, 신뢰했습니다.

당돌했던 덕분에, 처음 만리재에도 와봤습니다. 아직도 그날의 설렘, 떨림이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한겨레신문사 어느 구석진 회의실에서 머리 희끗한 <한겨레> 기자와 마주 앉았습니다. 언론의 역할, 지면과 광고의 경계 따위 이야기를 나눴던가. 기억은 희미합니다. 하지만 그때 처음, 마음이 일렁였나봅니다.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당돌한 독자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언론이라면, 비판적인 독자와도 눈 맞추는 언론이라면.

19년이 지난 지금, <한겨레21>을 비판했던 그때 그 신문을 새삼 꺼내봤습니다. 누렇게 색이 바래고 꼬깃꼬깃해진 신문을 보며 그때 그 마음을 떠올려봅니다. 스무 살의 내가 너무나 사랑했던 <한겨레21>.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마이너리티(소수자)의 삶을 기록하고, 시대를 앞서가는 도발적인 어젠다(의제)를 던졌던 <한겨레21>. 이 작지만 단단한 매체를 좀더 새롭게, 좀더 탁월하게 만들 궁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 궁리의 첫머리에는 독자가 있습니다. 2013~2017년 <한겨레21> 기자로 일하면서 세상을 살피는 눈을 넓히고, 기사의 깊이를 더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출입처의 말과 글을 받아적는 일보다 행복했습니다. 현장을 누비며, 불평등·기본소득·청년 등의 어젠다를 공부하고 심층 취재했습니다. 하지만 늘 허기졌습니다.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졌습니다. 1년 전 <한겨레21>에 다시 돌아온 뒤에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전에는 독자를 이해하고, 독자와 어떻게 ‘연결’할지 고민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독자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독자에게 필요한 어젠다를, 독자의 삶과 맞닿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독자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려 합니다.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연결’부터 시도해봤습니다. 애초 준비했던 이번호 표지이야기는 ‘기기묘묘한 대가들’이었습니다. 김선식 기자는 바닷속에 들어가서 비늘 수를 일일이 세어가며 물고기 세밀화를 그리는 화가를 만났습니다. 구둘래 기자는 온갖 한국 식물 이름과 그 유래를 탐구해 책 1928쪽에 한땀 한땀 눌러 담은 ‘강호의 식물 고수들’을 찾아나섰습니다. 물고기 세밀화, 식물 이름 등이 예쁘게 들어찬 표지 이미지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주 내내 검찰 ‘고발 사주’ 의혹이 심상치 않게 커졌습니다. 연일 어지러운 진실 공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선 정국이 요동치는 듯합니다.

소소한 재미냐, 뜨거운 관심사냐. 선택은 독자에게 맡겼습니다. 이번호 표지는 <한겨레21> ‘독자편집위원회 3.0’ 단체대화방에서 독자들이 결정해주신 결과물입니다.

다시, 기대하며 기다려봅니다. 독자 여러분께 먼저 손 내밀고, 귀를 열고, 눈을 맞추려 합니다. 스물일곱 <한겨레21>, 다시 시작입니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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