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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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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쟁 끝이 ‘탈레반 2.0’ 천하라니

등록 2021-09-10 18:07 수정 2021-09-11 04:41

2021년 8월3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에 걸친,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을 끝냈다”며 종전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전날 밤, 미군의 마지막 수송기가 아프간 수도 카불의 공항을 떠났습니다. 2001년 10월, 미국이 9·11 테러를 저지른 알카에다의 창설자 오사마 빈라덴을 잡겠다며 아프간을 전격 침공한 지 꼭 20년 만에 전면 철군을 단행한 겁니다. ▶관련 기사= 아프간을 정복 못했다.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수작전을 대단히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며 “이런 일은 역사상 어느 나라도 한 적이 없다. 오직 미국만이 수행할 능력과 의지가 있으며, 우리는 그 일을 해냈다”고 자평했습니다. “미국을 해치려는 자, 미국과 동맹국에 대한 테러에 관여하는 자들”에 대해선 “지구 끝까지 쫓아가 무찌를 것이며 궁극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아프간 국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과 인권 옹호를 계속하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습니다. 철군의 혼란을 둘러싼 비난 여론을 누그러뜨리고 미국의 힘과 도덕적 우위를 과시하는 양수겸장으로 읽힙니다.

그런데 바이든의 다짐이 조금은 공허하게 들리는 건 왜일까요? 약 26분에 걸친 그의 종전 선언 연설에 ‘승리’(Victory)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아프간이 ‘제국의 무덤’이라는 속설이 또 한번 확인됐다는 촌평도 허전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보다는,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다수의 동맹국이 참전한 아프간 전쟁의 성과가 너무나 허탈하고, ‘아프간 재건’을 위해 들인 엄청난 돈과 노력에도 아프간 국민은 여전히 극심한 혼란과 불투명한 미래만을 떠안았기 때문입니다. 20년 전쟁 동안 교전 당사국 군인과 민간인 23만 명(최소 추정치)이 목숨을 잃었는데, 사망자의 96.5%는 아프간과 인접국 파키스탄에서 나왔습니다.

미국의 아프간 철수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중단이라는 현실적 계산에 더해, 국가안보의 핵심축을 최대 경쟁국이자 위협인 중국을 견제하는 데 놓겠다는 전략적 판단의 결과입니다. 바이든은 “세상이 변하고 있다”며 “중국과의 심각한 경쟁”을 미국이 당면한 4대 안보 위협의 첫 사례로 들었습니다. 다른 셋은 러시아의 도전, 사이버 공격, 핵확산입니다. 아프간 국민한테 미국은 침략국이지만, 미국 역시 3천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9·11 테러의 피해국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유엔의 승인도 없이 주권국을 침략한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20년 전쟁으로 피폐하고 망가진 삶터에서 계속 살아가야 할 아프간 국민입니다. 미국이 떠난 아프간은 외곬으로 비뚤어진 ‘탈레반 2.0’ 세상이 됐습니다. 엄격한 ‘샤리아(이슬람 율법) 통치’를 내세우는 탈레반은 미군이 남기고 간 최신 무기들로 더 강해졌고, 국제사회의 거친 눈길을 의식해 더 유연해졌습니다. 그들은 아프간 국민이 선출한 합법 정부가 아니라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세력입니다. 탈레반은 과도정부를 선포한 데 이어 합법성 인정과 경제 재건을 위해 중국에 러브콜을 보냅니다. 중국은 “아프간에 무정부 상태가 종료됐다. 신정부와 소통을 원한다”고 화답했습니다. 미국 의도와는 정반대인 역설적 결과입니다.

황지우 시인은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뼈아픈 후회’ 중에서)라고 읊었습니다. 지금 미국에선 아프간 전쟁 20년의 교훈을 찾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미국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눈여겨볼 타산지석입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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