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이) 초원이가 저보다 하루 먼저 죽는 거예요. 나 없인 하루도 살 수 없을 테니까요.”
2005년 개봉한 영화 <말아톤>에서 발달장애를 앓는 아들 초원(조승우 분) 곁을 지켜온 엄마(김미숙 분)가 담담하게 내뱉은 이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습니다. 처음 만난 발달장애인과 그의 엄마에 대한 기억이 겹쳤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책상을 나눠 쓰는 짝이었습니다. 아침마다 지각하지 않으려고 교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보면 그는 책과 공책을 가지런히 펴고 차분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너저분하고 수다스러운 나와 달리 그는 깔끔하고 말수가 적었습니다. 종일 한마디도 나누지 않을 만큼 서먹한 관계였지만 그렇다고 불편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짝과 함께 문제를 풀라는 선생님 말씀에도 멀뚱멀뚱 나를 쳐다만 봐 당황스러울 때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럴 때면 어디선가 그의 엄마가 나타나 함께 문제를 풀어주었습니다. 어린 눈에도 그와 그의 엄마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여겨졌습니다.
2018년 ‘잠실야구장 노예’로 알려진 지적장애인 신태원(62·가명)씨는 어머니가 숨진 뒤 여러 공장을 전전하다 잠실야구장에서 쓰레기를 분리하며 십여 년을 지냈습니다. 2014년 전남 신안군의 섬 신의도에서 ‘염전 노예’로 일하던 김아무개(당시 40살)씨는 어머니에게 구출 요청 편지를 보낸 끝에 섬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1312호 표지이야기를 읽으며 초등학교 6학년 때 짝과 그의 엄마를 다시 떠올립니다. 국가와 사회가 장애인을 책임지지 않는 냉혹한 현실에서 장애 자녀가 하루 먼저 죽는 소원을 여전히 품고 있을 엄마들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잠실야구장이나 염전에서 일어난 장애인 학대는 수십 년에 이를 정도로 오래돼, 충격적인 실상을 언론이 앞다퉈 보도하고 처벌 여론도 들끓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가해자가 노동착취로 엄벌에 처해지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한겨레21>이 확인한 결과, 2018년 보건복지부가 장애인 학대로 뽑은 주요 사건 10건(재판 진행 2건) 가운데 가해자가 처벌받은 경우는 절반(5건)에 그쳤습니다. 이마저도 벌금형(3건)과 집행유예(1건)가 다수였고 1건만 실형이 나왔습니다. 신태원씨를 부려먹었던 고물상 업주도, 김씨 등을 섬에 가두었던 염전주의 죗값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경찰과 고용노동부, 검찰, 법원이 장애인의 노동을 ‘울력’(봉사노동)이나 ‘품앗이’로, 노동착취를 ‘지역 관행’이라며 면죄부를 주는 탓입니다. 칠면조 가공 공장에서 지적장애인의 노동을 수십 년간 착취했던 업체에 미국 법원이 3천억원 가까운 손해배상 판결을 내린 반면, 우리나라 법원에선 10년간 염전에서 일한 장애인에게 8천만원만 지급하면 정해진 공식처럼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했답니다. 솜방망이 처벌은 또 다른 장애인의 노동착취를 낳습니다. 타이어, 원양어선, 축사 등 장소만 달라질 뿐 장애인 노동착취는 오늘도 되풀이됩니다.
여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작은 날갯짓이 있습니다. ‘염전 노예’ 피해자를 대리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던 공동대리인단이 지적장애인 노동착취 사건에서 부실 수사를 경험한 피해자를 지원하고 수사 절차와 관행을 바로잡는 프로젝트 ‘울력과 품앗이’를 시작합니다. <한겨레21>은 취재와 보도로 동참하겠습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중립인 척 최상목의 ‘여야 합의’…“특검도 수사도 하지 말잔 소리”
박종준 전 경호처장 긴급체포 없이 귀가…경찰, 구속영장 검토
“김건희가 박찬욱에게, 날 주인공으로 영화 한편 어때요 했다더라”
연봉 지키려는 류희림, 직원과 대치…경찰 불러 4시간만에 ‘탈출’
“임시공휴일 27일 아닌 31일로” 정원오 구청장 제안에 누리꾼 갑론을박
경호처 2·3인자가 김건희 라인…‘윤석열 요새’는 건재
“최전방 6명 제압하면 무너진다”…윤석열 체포 ‘장기전’ 시작
윤석열 수배 전단 “술 고주망태, 자주 쓰는 말은 반국가세력”
최상목의 윤석열 체포 ‘지연 작전’…‘특검 합의’ 내세워 국힘 편들기
국민·기초연금 1월부터 2.3% 인상…물가상승률 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