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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법칙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9-11-12 10:42 수정 2020-05-03 04:29

공정이란 뭘까. 사전적 의미는 공평하고 올바름이다. 공평이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름을 뜻한다. 공정과 비슷한 말로는 공명정대, 공평, 정당이 있다. 반대말로는 부정, 불공정, 혼탁이 있다.

신뢰란 뭘까. 굳게 믿고 의지한다는 말뜻을 지녔다. 유의어로는 신의·신빙·신망이, 반의어로는 의심·불신이 있다.

공정하지 못한 대상을 신뢰할 순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불공정한 대상은 불신한다. 공정과 신뢰는 뗄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은 공정하지 못한 나라다. 공정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트럼프한테서 공정하지 않다는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건 냉정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아이러니다.

“한국에는 휴전선이 있고 미군들이 장벽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대가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을 82년 도왔었는데 거의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 힘들게 지켜주는데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미국만 손해 봤다는 얘기다. 대통령 후보 시절엔 좀더 직설적이었다. “공짜로 미군 쓰는 한국” “(한국이 미군에 주는 돈은) 푼돈에 불과” “쥐꼬리만큼 낸다”. 협상의 지렛대로 쓰기 위한 트럼프의 정치적 수사라고 무시하고 넘기기엔 반복적인 동시에 매우 일관된다. 한국이 미국을 ‘벗겨 먹고 있다’고 참모들에게 말할 정도다.

동맹에 대한 예의에도 벗어나지만 힘에서 압도적 우위를 지녀 결코 가볍게 받아칠 수 없다. 대등한, 공정한 협상 자체가 어려운 국력의 차이가 존재한다.

한국은 1989년부터 미국에 방위비 분담금을 지급해왔다. 302억원(4500만달러)이던 첫 분담금이 올해 1조389억원에 이른다. 30년 동안 34배 증가했다. 국민에게서 세금을 걷어 줘야 하는 돈이다. 그사이 우리나라 전체 예산은 25배 늘었고, 그 가운데 국방비는 8배 늘었다. 같은 기간 경제 규모는 5배 커졌다. 전체 예산, 국방비, 경제 성장에 비춰보더라도 주한미군에 지급하는 방위비 분담금의 증가폭이 훨씬 크다.

상대가 감당할 수준 이상으로 급격히 인상을 요구한다면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요구는 불공정하다.

2018년 1월의 일이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에게서 해외 주둔 미군의 현황을 듣던 트럼프 대통령이 질문을 던졌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대가로 미국이 얻는 건 뭔가? 매티스 장관은 이렇게 답한다. 해외 주둔 미군은 미국의 안보를 위한 조치다. 트럼프가 다시 묻는다. “그건 손해 보는 거래다. 한국이 주둔 비용으로 1년에 600억달러 정도 낸다면 괜찮은 거래일 수 있다.” 69조원이 넘는 돈이다. 우리나라 국방비를 크게 웃돈다. 현재 분담하는 방위비의 70배니, 사실 따져볼 가치도 없는 숫자다. 이런 요구를 하는 것 자체가 불공정한 게 아닌가.

이 황당한 수치는 좀 덜 황당한 수치로 현실에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그의 참모들이 최근 앞다퉈 방한했다. 여러 목적이 있지만, 트럼프가 원칙으로 삼은 방위비의 공정한 분담을 한국에 관철하기 위해서다. 트럼프의 참모들이 공정한 분담액으로 제시한 수치는 6조원이었다. 올해 분담액의 6배이자 우리나라 국방비의 13%다. 역시 터무니없이 불공정한 숫자다.

미군이 주둔하는 다른 나라들에 견줘서도 공평하지 않다. 토지 임대료, 미군 기지 이전 비용, 미군 탄약 저장 관리비 등을 반영해 실제 분담률을 계산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때마다 으레 보수 언론 등을 통해 흘러나오는 얘기가 있다. 주한미군 철수 혹은 감축설. 그게 압박이 되어 방위비 분담금은 미국이 의도한 숫자에 가깝게 계속 인상돼왔다.

처음부터 힘이 룰이었지만, 앞으로도 신뢰와 공정이 아닌 힘이 분담액을 밀어올리는 게임은 계속될 것이다. 주한미군 감축과 철수란 주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바꿀 수 없는 규칙인지 모른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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