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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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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에 대한 불편함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9-02-16 15:28 수정 2020-05-03 04:29

‘곱징역’이라던 보호감호제를 취재하러 2003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 갔을 때다. 동행하던 한국인 교수가 교도소 취재를 마치고 슈퍼마켓으로 가는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상점이 곧 문을 닫는단다. 아직 저녁 8시도 안 됐는데.

프라이부르크는 지난해 10월 tvN 예능 프로그램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 나와 더욱 유명해졌다. 방송에 출연한 김진애 건축가는 이곳을 “환경과 태양의 수도”라고 치켜세웠다. 벌의 천국이 된 공동묘지와 친환경에너지로 살아가는 보방마을을 보면, 누구라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프라이부르크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꾀하는 생태도시의 대명사다.

16년 전 이 작은 도시는 이미 생태도시로 뜨고 있었지만, 정작 나의 마음을 끈 건 영업시간 제한이었다. 도심 대형 가게들은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만 영업할 수 있다. 도시 외곽 작은 가게들은 저녁 6시면 문을 닫아야 한다. 토요일엔 오후 4시까지도 문을 열 수 있지만, 일요일엔 장사를 해선 안 된다. 이 도시만의 독특함은 아니다. 영업시간을 못 박은 독일의 ‘상점 폐점법’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1900년 연방법이 처음 나왔고, 19년 뒤부터는 일요일에 문을 열거나 평일 아침 7시~저녁 7시의 영업시간을 어기면 처벌받았다. 뼈대가 흔들리지 않은 채 오랫동안 유지된 배경엔 종교적 이유와 함께 노동자의 쉴 권리 보호가 크게 작용했다. 너무 불편해 보일지 모른다. 장사할 자유를 제약하는 공산 도시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프라이부르크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도시다.

지난주 금요일 중국 베이징 특파원으로 떠나는 정인환 기자를 위한 환송식을 했다. 한식주점에서 시작된 자리는 양꼬치집, 순댓국집으로 이어졌다. 지하철 막차를 타기 위해 자정 넘어 먼저 자리를 떴다. 새벽 1시30분쯤 집 근처 편의점에서 딸아이를 위한 초콜릿을 샀다. 손님으로 꽉 찬 주점과 꼬치집, 국밥집에서 누군가 노동을 하고 있어서 프라이부르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서울에서는 가능하다. 그 늦은 시각에도 술을 마시고 물건을 살 수 있는 편리를 누리는 우리는 과연 얼마나 행복한가.

‘잠잘 때 주문, 눈 뜨면 도착’ ‘밤 11시까지 주문시 다음날 7시 도착’ ‘신선식품 새벽 배송’ ‘오늘 드림’ ‘30분 배송제’…. 경쟁하듯 시간 단축을 약속하는 배송 업체들의 광고. 소비의 편리함을 향해 내달리는 속도는 무서울 만큼 살인적이다.

지난 1월4일 저녁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사는 성아무개씨가 소파에 누워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심근경색이었다. 그는 씨제이 대한통운 동작터미널에서 일하는 택배 노동자다. 노조 쪽 주장으로는 하루 최대 14시간, 회사 쪽에서 밝힌 노동시간마저 지난해 12월 주당 평균 63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을 했다. 성씨가 과로 탓에 숨졌다는 의혹이 나왔다. 지난해에는 이 회사의 택배 노동자 3명이 안전사고로 숨졌다. 사실 얼마나 많은 이가 좀더 빨리 배송하려다 목숨을 잃는지 알 수 있는 통계조차 없다.

가 지난해 근로복지공단 자료를 분석한 걸 보면, 10대 청소년 배달원만 해도 해마다 10명씩 일하다 목숨을 잃는다. 산업재해로 잡힌 것만 이러니, 실제는 이보다 많을 게 틀림없다. 부상 산재 신청자는 4523명에 이른다.

전기가 발명된 뒤 인간의 평균 수면 시간은 1시간 반쯤 줄었다고 한다. 교통이 발달해 우리는 더 빨리 어디론가 이동하지만 더 일찍부터, 더 멀리 가서, 더 늦게까지 일한다. 편리함을 제공하는 사람은 편리함을 누리는 사람을 위해 더욱 힘들게 일하는 세상이다. 때론 죽음으로 내몰린다. 이쯤 되면 편리함은 불편함이다.

김진애 건축가는 에서 프라이부르크를 “새로운 삶의 모델을 보여주는 도시”라고도 말했다. 그 모델에서 환경만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 소비와 생산의 ‘느린 균형’을 배워보면 어떨까.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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