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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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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인심이 평화다

등록 2011-05-25 15:02 수정 2020-05-03 04:26

영국 여왕이 5월17일 더블린에 나타났다. 에메랄드 녹색 코트를 입고서. 아일랜드 상징색이다. 영국 왕의 방문은 100년 만이자 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분리·독립한 1921년 이래 처음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군의 아일랜드인 학살 현장인 크로크파크 경기장을 찾았고, ‘아일랜드 독립유공자 추모공원’에 헌화·묵념했다. 영국-아일랜드 관계는 피로 얼룩졌으니, 당연히 여왕의 방문에 반대하는 아일랜드인들이 있다. 그렇더라도 양국 관계에 화해의 봄바람을 일으키려는 초대형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BBC'는 달에 처음 간 사람인 닐 암스트롱의 말에 빗대 “여왕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양국 간 역사에서는 엄청난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한반도에도 저런 가슴 설레는 봄바람이 분 적이 있다. 2000년 6월과 2007년 10월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은 그 정점이었다.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은 화해·협력의 봄바람이 키운 가장 아름다운 꽃과 나무다. 이산가족 상봉은 증오를 눅이는 씻김굿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뒤 한반도의 시계는 냉전시대로 쾌속 역회전 중이다. 193만여 명이 다녀온 금강산관광길은 2008년 7월11일 박왕자씨 피격 사망 뒤 끊겼다. 2010년 3월26일 천안함 침몰 뒤 이명박 정부는 5·24 조처로 개성공단사업을 제외한 모든 교류협력사업과 대북 인도적 지원을 사실상 금지했다. 2010년 11월23일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은 화해와 협력을 바라는 이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상황은 심각하다. 5·24 조처 이전 1년(2009년 6월~2010년 5월)과 그 뒤 10개월(2010년 6월~2011년 3월)을 비교하면 남북 간 일반 교역은 94.4%, 위탁가공은 66.0% 줄었다. 날개 없는 추락에 가깝다. 1천여 곳으로 추산되는 대북 경협업체들은 폐업·전업·휴업 등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 경협업체 사장은 “우리는 남북 양쪽의 인질”이라고 했다. 북쪽은 남북관계가 막히자 중국 의존도를 높이고 있다. 예외가 있다. 2010년 교역 규모가 전년보다 53.4% 증가한 개성공단사업이다. 절망을 무지를 희망의 씨앗이다.
미국 정부는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가 식량지원 문제를 협의하러 북한에 간다고 밝혔다. 아마도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면 그는 평양에 있을 것이다. 한국 정부의 고위 당국자는 언론 브리핑에서 “가서 보고 줄지 말지를 판단하겠다는 것”이라고 했지만, 부질없는 눈 가리고 아옹이다. 정부 인사들조차 사석에선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은 택일만 남은 사안”이라고 말한다. 이미 지난 4월17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청와대로 이명박 대통령을 찾아와 대북 식량지원 방침을 밝히며 남북대화를 권유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은 북한의 천안함·연평도 관련 사과가 먼저라며 남북대화와 식량지원을 거부했다. 이명박 정부는 지금껏 북쪽에 쌀 한 톨 주지 않았다.
참 엽기적인 상황이다. 북한과 미국은 전쟁을 치른 적성국 사이다. 아무런 외교관계도 없다. 한국과 미국은 동맹국이다. 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남북기본합의서 전문)다. 하여, 남북교역엔 관세도 물리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은 적성국 북한에 식량을 주겠다고 하고, 한국은 동포한테 ‘밥’을 줄 수 없다고 버틴다. 굶주리는 북녘의 장삼이사들에게, 밥을 주려는 ‘미 제국주의자’와 그걸 뜯어말리려는 ‘남조선 동포’ 가운데 누가 사람으로 비칠까. 직접 물어볼 필요도 없다. 세종대왕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食爲民天)라고. 1847년 아일랜드에서 대기근으로 인구 800만 명 중 200만여 명이 굶어 죽을 때 영국이 먹을거리를 건네는 선의를 보였다면, 많은 아일랜드인이 지금까지 영국을 철천지원수로 여기진 않을 것이다. ‘밥 인심’은 증오보다 강하고 이념보다 오래간다.
한겨레21 편집장 이제훈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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