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년 1월. 겨울밤의 매서운 바람이 수도 개경(현재의 개성)을 둘러싼 성곽에 휘몰아쳤을 때, 분명 스물일곱의 청년 임금은 바람과 맞서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 8대 임금 현종은 바람을 맞으며 성곽 밖, 겨울의 어둠 속에서 가물거리는 불꽃을 봤을 것이다. 그곳에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온 거란군이 있었다. 분명히 현종은 정면으로 응시했을 것이다.
993년 시작된 고려와 거란(요나라) 간의 전쟁(여요전쟁)은 1019년까지 20년 넘게 이어졌다. 그 기간에 거란이 고려를 대규모로 침공한 것은 총 세 차례다. 현종은 그중 두 차례, 1010년∼1011년과 1018년∼1019년의 전쟁에서 고려 쪽 최고지도자였다. 이 칼럼을 맡으면서 그중 1011년 거란의 두 번째 침공(제1432호 ‘자신을 책망한 현종, 남탓만 하는 대통령’)을 다뤘다. 갓 왕위에 올랐던 열아홉의 국왕은 대규모 거란군의 침공에 도성 개경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 사이 청년이 된 현종은 무수한 선택과 결정을 내리면서 왕으로 성장했다. 도망갔다가 돌아온 왕은 폐허가 된 도성을 수리했고, 거란과 맞서 싸운 병사와 군관들을 격려하고 보상금을 나눠줬다. 지출이 급증하면서 국가재정은 거덜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럼에도 왕은 유능하고 똑똑하고 야심 있는 사람들을 계속 북방으로 보냈다.
기록은 이 시기 현종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쓰지 않았다. 하지만 느낄 수는 있다. 중간에는 지급된 토지를 불합리한 이유로 빼앗기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현종은 가까스로 이 반란을 진압했지만, 핵심 반란군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다음 해에 풀어줬다. 왕조시대 반란에 대한 처우치곤 관대했다.
1018년 겨울. 10만 거란군이 소배압의 지휘를 받아 세 번째로 고려를 침공했다. 분위기를 감지한 고려 조정은 강감찬을 총대장으로 삼아 20만 고려군을 올려 보낸다. 강감찬이 흥화진(현재 평안북도 의주)에서 거란군을 무찔렀지만 소배압은 거란군의 주력이 정예기병인 것을 이용해 고려군을 우회, 개경으로 직진한다. 몇 차례 고려군은 거란군의 후미를 잡아챘지만 소배압이 이끄는 본대는 거센 추격을 뿌리치면서 개경으로 내달렸다.
누가 봐도 개경에 있는 국왕 현종을 노린 것이었다. 자연히 개경 내에는 10년 전 도망의 기억이 되살아났을 것이다. 고려군 주력은 강감찬을 따라 개경을 벗어나 있었다. 무전도 공중정찰도 없던 시대였다. 강감찬이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개경 시내에서는 도망을 다시 가야 한다는 의견이 분명히 나왔을 것이다. “지도자가 붙잡히면 국가는 끝장입니다”라는 신하들의 목소리가 궁궐을 울렸을 것이다. 10년 전 현종이 했던 선택이기도 했다. 1592년의 선조도, 1950년의 이승만 대통령도 중과부적을 이유로 그 선택을 했다.
1019년 1월의 현종은 달랐다. 청년 임금은 개경 주변의 주민들을 성안으로 집결시키고, 청야전술을 써서 개경 주변을 비웠다. 개경을 지키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부족한 병력을 나눠 성벽을 지켰다.
난감해진 건 거란군이었다. 빠르게 내려오느라 공성 장비도 없었고, 식량은 부족했다. 현지 조달도 현종이 개경 주위를 황폐화하는 바람에 어려웠다. 결국 거란군은 계략을 꾸민다. 거란군 장수가 ‘돌아가겠다’며 기병 300명을 데리고 개경의 한 성문 앞으로 다가온다. 방심한 고려군이 성문을 열면 곧바로 짓쳐 들어가겠다는 계략이었을 것이다.
기록은 그다음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가 보낸 군사 100명이 밤을 틈타 엄습하여 죽였다.” 300명을 상대하기 위해 100명을 보냈다는 건, 개경에 남아 있던 병력 중 최정예가 출격했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거란군 총대장 소배압의 의도를 개경의 고려군 지휘관들이 꿰뚫어본 것이다. 개경에 남은 최정예 병력이었던 만큼, 국왕을 경호하는 근위대 중 일부가 차출됐을 수도 있다.
결국, 소배압은 개경을 넘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 그는 남은 거란군을 이끌고 개경에서 등을 돌렸다. 강감찬이 이들의 뒤를 쫓았고, 평안도 귀주(현재 구성)에서 거란과 고려군이 정면으로 부딪친다. 한국사 3대 전투로 부르는 귀주대첩이다.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대승을 거뒀다. 기록은 침공한 10만 거란군 중 살아서 돌아간 자는 수천 명에 불과하다고 썼다. 26년에 걸친 고려와 거란 간의 전쟁이 드디어 끝나는 순간이었다. 현종은 개경 밖에까지 멀리 나가 돌아오는 강감찬을 환영했다고 한다.
여요전쟁에서 고려의 최대 공로자는 단연 강감찬이다. 귀주대첩이 없었더라면 거란군은 또다시 개경을 위협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종이 없었더라면 고려는 귀주대첩까지 가지도 못했다. 왕조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최고권력자로서의 책임감, 너그러움과 단호함을 상황에 따라 번갈아 가며 쓸 수 있는 유연함. 현종은 이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호한 의지가 있었다.
현종은 아버지 안종과 어머니 헌정왕후 사이의 불륜 결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다 죽었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와 헤어졌고, 두 살 때 가까스로 다시 만났지만 곧 아버지가 사망했다.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 자라날 때는 왕실의 권력투쟁으로 숱하게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
현종은 이 모든 것을 극복했다. 어릴 때부터 인간사에서 많은 배신과 실망을 봤을 게 분명한 현종이었지만, 그의 선택에서는 타인에 대한 의심이나 시험보다는 믿음과 신뢰가 더 강하게 묻어나온다. 반란 주모자들에 대한 관대한 처리,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신하들에게도 보여준 믿음, 그리고 목전에 다가온 거란군 앞에서 보여준 강력한 책임감.
천년이 지난 현재의 대한민국에, 지금 정치인들에게 현종이 보여준 행동을 마지막으로 전하려 한다. 천년 전에도 지금도 이 땅 위에 가장 필요한 ‘정치’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도형 <세계일보> 기자
*‘역사와 정치 평행이론’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수고해주신 이도형 기자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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