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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이기려고 하면 온 조정이 다 빌 것” 정인홍이 민주당에 남긴 교훈

다른 세력 비난하는 상소 올렸다가 유학자 명단에서 삭제된 정인홍
민주당 강경 지지층의 ‘범인 찾기’…강요하는 것이 정치될 수 없어
등록 2023-03-03 11:36 수정 2023-03-05 05:59
경남 합천 정인홍의 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누리집

경남 합천 정인홍의 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누리집

1611년 3월(이하 음력). 여든이 다 돼가는 시골의 한 선비가 올린 상소가 조선 조정에 접수됐다. 상소를 읽은 국왕 광해군은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 내에는 상소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이후 승정원과 양사(사헌부·사간원)의 대간, 유생들이 나서 선비를 규탄했다. 광해군이 별다른 의도가 없다며 진정시키려 했으나 흥분한 유생들은 이 선비의 이름을 유학자 명단에서 삭제해버렸다.

선비의 이름은 내암(來庵) 정인홍. 그가 올린 상소는 조선 명종(1545∼1567년) 때 인물인 회재(晦齋) 이언적과 퇴계(退溪) 이황을 비판하는 ‘회퇴변척소’였다.

유생 처벌하려 하자 성균관 비우며 항의

광해군이 정인홍을 두둔한 것은 그가 강력한 광해군의 지지자이자 ‘여당’ 북인(대북)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은 강직한 성품을 지녔고, 일평생 의(義)를 추구했다. 의로움을 추구한 선비답게 완고했다. 예순이 다 된 나이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고향인 경상도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광해군이 세자일 때 그를 보호하겠다며 국왕 선조와 대립했다.

정인홍의 상소는 오현종사(五賢從祀)에서 비롯됐다. 1610년 가을. 조선 조정은 오랜 논의 끝에 성균관에 있는 공자의 사당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도 같이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했는데 이를 오현종사라고 한다. 정인홍은 이 중 이언적과 이황을 문제 삼았다. 직설적이고 완고한 성격의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이 사림들이 피해를 본 을사사화와 양재 벽서 사건 당시 조정의 벼슬을 지냈다며 “소인이 득세하여 군자를 해칠 때 구하지 못하고 같이 행동한 수치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황을 향해 “자기를 살피는 데에는 어둡고 남을 책망하는 것은 심하다”고도 했다.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보다 스승 조식이 문묘에 더 어울린다는 의도로 이들을 비난한 것에 가까웠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방식과 시점이었다. 오현종사가 끝난 뒤였고 조정 내엔 이언적과 이황의 제자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 눈에 정인홍의 상소는 감정적이고 모욕적이었다. 사태의 위험성을 감지한 광해군이 상소를 숨기려 했지만, 이미 승정원을 필두로 정인홍을 비판하는 상소가 몰려왔다.

이황의 제자들뿐 아니라 서인도 정인홍 비판에 가세하며 정치적 쟁점으로 번졌다. 광해군이 정인홍을 감싸자 분노한 유생들이 여든이 다 된 노(老)학자를 유학자 명단에서 삭제했다. 광해군이 명단 삭제를 주도한 유생들을 처벌하려 하자 유생들은 성균관을 비우는 행동으로 맞섰고, 대신들은 유생들을 감쌌다. 결국 유생 처벌은 없는 것으로 하는 선에서 겨우 마무리된다.

‘정의’ 추구했대도 ‘아집’ 될 수 있어

조식과 이황 중 누가 더 나은 학자인지는 학문 영역에서 가릴 일이다. 정인홍의 상소는 학문이 아니라 정치로 봐야 한다. 이황을 비판한 정인홍의 상소는 그가 얼마나 비타협적 정치를 했는지 알려주는 방증이다. 정인홍이 이끈 북인(대북)도 광해군 치세 동안 비타협적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아흔이 다 된 정인홍을 서울로 끌고 와 광해군의 실정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참형에 처했다. 정인홍이 그만한 형벌을 받을 잘못을 한 건 아니었다. 서인의 처사는 과도한 감이 있다. 하지만 정치 영역에서 정인홍과 북인의 비타협·완고함이 그런 결과로 이어진 것도 사실이다.

비타협은 동일한 이념과 시선을 가진 집단 내에선 ‘정의’로 칭송받지만, 다른 경험을 지닌 집단과의 충돌에선 자칫 ‘아집’과 ‘독선’이 된다. 이 아집과 독선이 바르다고 믿으면 감정적 싸움으로 번지기 쉽다.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 세상의 보편적 진리다. 2023년 2월27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체포동의안 부결 이후 민주당에서 벌어지는 일도 마찬가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7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를 마친 뒤 걸어 나오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7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를 마친 뒤 걸어 나오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민주당은 169석을 가진 거대 정당이지만, 그 당을 이끄는 이 대표를 겨냥한 체포동의안에 국회의원 중 138명만이 반대했다. 여당 국민의힘 의석(115석)보다 많은 139명이 체포동의안에 찬성했고, 기권과 무효표도 20표나 나왔다. 최소한 민주당 내 30여 명이 이 대표 ‘체포’에 소극적·적극적 동의를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당장 이 대표 지지층에서 ‘비명’계로 불리는 이 의원들을 겨냥한 비판이 터져나왔다. 강경 지지층에선 체포동의안에 반대하지 않았을 것으로 ‘의심’되는 의원들의 명단을 만들고, ‘범인 찾기’에 나섰다. 의심 의원들은 강경 지지층의 폭탄 문자에 시달렸고, 민주당 당원 게시판엔 이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게시글이 올라오고 있다.

이 대표를 보호한다면서 다른 이들과 격하게 대립하는 강경 지지층의 행동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2022년 대선 과정에서도 그랬다. 이 대표 강경 지지층만 그런 것도 아니다. 6년 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선 문재인 전 대통령을 지지·옹호하는 강경 지지층이 이재명 대표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등 당내 경쟁 후보들을 격하게 비난했고, 문 전 대통령은 강경 친문(친문재인) 지지층의 행위를 ‘양념’에 비유해 사실상 방조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자기 생각만이 옳다는 ‘정치’

특정인을 지지하는 강도가 큰 것이 죄는 아니다. 문제는 그걸 강요하는 것을 정치라고 착각하는 태도다. 자기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고 그것만이 옳다는 태도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정치라고 부를 수 없다. 정인홍의 상소로 조정이 뒤집힌 뒤 좌의정 이항복은 광해군에게 “치우친 생각을 고집하고 도리를 생각하여 따져보지 않은 채 줄곧 이기려고 하니 장차 온 조정이 다 빌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항복의 이 경고는 인조반정으로 현실화가 됐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경험과 인식에 따라 제각기 다른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진다. 개별로 살 땐 옳음의 기준이 다르더라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산다. 서로 다른 견해를 조율해야 하는 게 이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에서는 더더욱 ‘협의’와 ‘조율’이 필요하다. 4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도형 <세계일보> 기자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언론사 정치부에서 국회와 청와대 등을 8년간 출입한 이도형 기자가 역사 속에서 현실 정치의 교훈을 찾아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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