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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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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윤 대통령… 권력의 언행은 명확해야 한다

조선 태종, 조선판 ‘세월호’ 조운선 사고 나자 제도 개선 ‘분명한 관심’
윤석열 대통령, 무인기·이태원 모두 흐릿하기만… “의도 명확히 해야”
등록 2023-01-21 23:26 수정 2023-01-22 07:00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전통한선 복원 사업에 따라 조선 후기 <각선도본>(各船圖本, 1797)에 실린 도면을 참고해 재현한 선박. 조운선은 조선 후기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물을 뱃길을 통해 한양으로 운반하는 데 쓰였다. 곡물을 많이 싣기 위해 뱃전이 높고 넓은 것이 특징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전통한선 복원 사업에 따라 조선 후기 <각선도본>(各船圖本, 1797)에 실린 도면을 참고해 재현한 선박. 조운선은 조선 후기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물을 뱃길을 통해 한양으로 운반하는 데 쓰였다. 곡물을 많이 싣기 위해 뱃전이 높고 넓은 것이 특징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1403년 6월3일. 경상도에서 세곡(세금으로 걷힌 쌀)을 싣고 한양으로 향하던 조운선(漕運船) 34척이 침몰했다. 기록은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고 썼다. 관리가 생존자 수색을 벌이다 한 사람을 찾았는데, 그는 관원을 보더니 도망갔다. 붙잡아 까닭을 물으니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떠나려 했다”고 말했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보다 ‘국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망간 것이다.

과거 바다로 쌀을 운반하는 뱃길은 고통스럽고 위험스러웠다. 현재와 같은 일기예보도 없었고 바닷속 암초의 위치는 물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풍랑은 시시각각 변했고, 물살은 배를 집어삼키기 일쑤였다. 조선 정부는 당근보단 채찍으로 배를 다루는 사람들을 다뤘다. 조운선을 모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습이었다. 조정은 이들이 제 기한에 도착하지 않으면 죄를 물었다. 고려 말기부터 늘어난 왜구도 문제였다. 왜구는 툭하면 조운선을 덮쳤고, 뱃사람들을 끌고 갔다.

아래는 위의 시선에 예민하다

소식을 들은 태종 이방원은 탄식하며 “책임은 나에게 있다”(責乃在予)고 말한다. 그는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도 배를 출발시켰으니 실로 백성을 몰아서 사지로 나가게 한 것 아니냐”며 “쌀은 아까울 것이 없지만 사람이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다.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지도자들이 사고가 터지면 으레 하는 ‘내 탓이오’ 발언으로 볼 수도 있다.

태종이 차별화되는 지점은 다음부터다. 그의 탄식에 한 신하가 “육로로 운반하는 건 더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태종은 “육로로 운반하면 소나 말의 수고뿐 아니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한다. 운송 경로 변경을 검토해보라는 지시로 읽힌다.

태종은 ‘사람이 죽는 것보다 낫다’는 말을 이후 논의 과정에서 다시 언급한다. 한 달 뒤 이 육로 조세 안건이 의정부 공식 논의 안건으로 올라온다. 한 달 동안 조정 내에서 의견 교환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의정부 논의를 거쳐 7월9일 태종은 경상도의 세곡은 육로로 옮기는 방안을 최종 확정했다. 또 태종은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식으로 왜구를 잡기 위한 목적의 소형 선박을 건조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국왕이 제도 개선과 백성 보호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예나 지금이나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시선이 어디에 닿는지에 예민하다. 그렇기에 윗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놓고 각종 분석과 해석이 곁들여지곤 한다. 설령 윗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어느 순간 분석은 확신이 되고, 오해는 진실이 돼버린다.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진정하게 행사하려면 명확한 자기 생각을 뚜렷이 전달해야 하는 까닭이다. 태종은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말과 ‘사람이 죽는 것보다 낫다’는 태도로 분명한 언행을 보였다. 신하들은 권력자의 분명한 태도에 조운제도를 바꿨고, 백성을 보호했다.

흐릿한 태도가 만드는 오해들

현 정부의 권력자들은 어떨까. 흐릿한 태도로 ‘오해’받게 하는 지점이 여러 번 관찰됐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2023년 1월5일 ‘북한 무인기 영공침범’ 사건 때 서울 용산 대통령실 비행금지구역 침범 가능성을 처음 제기한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향해 “국방부도 합참도 모른 정보를 어디서 입수했느냐”며 “당국에서 의문을 품고 있다”고 했다. 이어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은 “민주당이 우리 군보다 북 무인기 항적을 먼저 알았다면, 이는 민주당이 북한과 내통하고 있다고 자백하는 것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낸 김 의원에 대해 의심을 보인 것인데, 대통령실과 신 의원 모두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김 의원이 증명해야 한다는 논리다. 김 의원은 “지도를 볼 줄 아는 서울 시민도 알 수 있는 사항”이라고 반박했다.

‘북한 내통설’이라는 주장은 관심을 끌기 좋은 소재다. 이후 북한 무인기 영공침범 책임소재와 관련한 논의보다는 육군 대장을 한 4성 장군 출신인 김 의원이 이를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 이러한 프레임 전환은 우연일까.

‘이태원 참사’에 대한 현 정부의 말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대통령은 1월1일 신년사에서 수출 중점의 정책 추진과 노동·교육·연금 개혁을 2023년 중점 과제로 제시했다. 윤 대통령은 특히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신년사에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언급은 없었다.

신년사에 ‘이태원 참사’ 언급이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윤 대통령이 내심 참사를 소홀히 대한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의중 여부와 상관없이 윤 대통령이 관심을 보인 흔적이 없으면, 아랫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최근 들어 윤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는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2022년 12월27일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기관 보고에서 참사 인지 뒤 85분이 지나서야 현장에 도착했다는 지적에 “이미 골든타임이 지난 시각”이라고 반응했다.

명확하게 행사된 태종의 권력

조운선 침몰 사고 뒤 조정 관리들을 감시하는 사헌부는 조운선을 관리하는 삼도 체찰사와 경상도 수군절제사를 처벌해야 한다는 건의를 올렸다. 처음 태종은 바람 때문에 선박이 침몰했으므로 당시 법에 따르면 무죄라고 판단했다. 1년 뒤 태종은 뒤늦게 경상도 수군절제사가 술에 취해 배를 움직였다는 사실을 들었고 죄를 물었다. 태종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일치시켰고 명확하게 권력을 행사했다.

지금, 윤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와 북한 무인기 영공침범 사건에 대해 먼저 조사한 뒤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이다. 윤 대통령이 더는 ‘오해’를 받지 않았으면 한다. 윤 대통령도 현 정부도 명확한 언행으로 ‘아랫사람’에게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보여줬으면 한다.

이도형 <세계일보> 기자

*역사와 정치 평행이론: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언론사 정치부에서 국회와 청와대 등을 8년간 출입한 이도형 기자가 역사 속에서 현실 정치의 교훈을 찾아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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