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 년에 시작해 1270 년에 끝난 고려의 무인정권은 고려시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 무신이 정권을 잡고 국정을 이끌었다 . 반란과 역모가 빈번했고 , 역적은 들끓었다 . 난세라 부르는 시대였고 출세와 파멸이 어지러이 얽혔다 . 최충헌은 이 무인정권 집권자 11 명 중 네 번째였다 . 이어 아들 최이 , 손자 최향 , 증손자 최의에 이르기까지 최씨 가문 4 명이 고려를 사실상 통치했다 . 62 년으로 무인정권 시기 절반 이상이다 .
어떻게 가능했을까 . 노비 출신 전임 집권자 이의민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최충헌은 첫 일성으로 국왕 명종에 공정한 조세와 토지 분배 , 국가 기강 확립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 권력을 누리려고만 했던 전 무인 집권자들을 비판하면서 안정적 체제 진행을 원하는 당시 문신의 뜻과 합치하는 행동이었다 .
문신 , 더 정확히 말하면 고려 문벌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낸 최충헌은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다 . 그는 왕 두 명 ( 명종 과 희종 ) 을 끌어내렸다 . 관복이 아닌 일상복 차림으로 궁궐에 들어가는 특권을 누렸고, 경상남도 진주 지역을 자신의 직할지로 만들었다 . 진짜 왕은 무력했다 . 국왕 행차를 인도하라는 명을 받은 신하들이 만취해 나타났다는 기록은 그때 왕들이 얼마나 껍데기였는지 보여준다 .
‘ 최씨 왕조 ’ 성립도 가능했을 것이다 . 1211 년 국왕 희종이 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했을 때 최충헌의 부하들은 공공연히 왕을 죽이겠다고 외쳤다 . 하지만 최충헌은 부하들에게 “ 후세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두려우니 , 경거망동하지 마라 ” 고 막았고 희종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조치를 마무리했다 .
최충헌은 왕위에 오르지 않았던 걸까, 못했던 걸까 . 우리는 진실을 알 길이 없다 . 정권을 뒷받침한 문벌귀족들이 왕조 교체에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고, 몽골 침공으로 왕조 교체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 모든 해석이 맞을 수 있지만 , 기록 하나는 최충헌이 왕위에 오르지 않은 내면의 이유를 알려준다 .
최충헌 집권 말년 , 동아시아엔 칭기즈칸이 등장한다 . 몽골군으로 말미암아 북중국에 빚어진 혼돈이 고려에도 영향을 미쳤다 . 거란 유목민이 1216 년 고려를 향해 쳐들어왔다 . 좋게 말해 군대지 도적 떼에 가까웠다 . 정작 고려군은 이들을 막아내지 못한다 . 최충헌이 반란에 대비해 실력 있는 군사들을 자기 사병으로 두고 노약자만 관군에 편성한 게 주원인이었다 . 거란 유목민이 북방을 약탈했지만 , ‘ 실력이 충분한 ’ 최충헌의 사병들은 출동하지 않았다 .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한다 . “ 최충헌은 문객 ( 門客 · 비공식적 가신 ) 중 출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 거란 유목민을 막겠다고 사병을 수도 개경 ( 현재 개성 ) 밖으로 내보냈다가 개경 내에서 최충헌에 대한 ‘ 반란 ’ 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 .
정권을 잡을 때 개혁과 민생을 외쳤던 사람이 위기가 닥치자 자신만 생각했다 . 정권을 잡을 때 외친 ‘ 민생 우선 ’ 은 권력 유지 앞에서는 허망한 구호에 불과했다 . 권력 유지에 집착해 아들 ( 최이 ) 과 손자 ( 최항 ) 대까지 영광을 누리긴 했다 . 하지만 결국 그의 가문은 ‘ 역적 ’ 으로 몰락했다 . 1258 년 최충헌의 증손자 최의는 부하들의 반란에 뚱뚱한 몸으로 담을 넘으려다 실패해 살해당했고 최씨 가문은 무너졌다 . 이후 최충헌의 이름 앞에는 영원히 난신적자 ( 亂臣賊子 ) 라는 오명이 새겨졌다 . 고려사는 그의 인생을 ‘ 반역자 ’ 로 딱 잘라 규정한다 .
인간은 문명사회 이후 , 아니 그 이전부터 단 한 번도 서열사회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 따라서 서열의 윗선에 있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아랫사람들의 지지를 얻어낼 방안을 생각해내야 한다 . 민주주의 이전에는 왕조의 정통성이 그 방안이었다 . 정통성을 얻어내는 최고의 방법은 결국 , 권력자의 행동에 대한 믿음이다 . 자기 안위 지키기에는 성공한 최충헌은 믿음을 얻어내기에는 실패했다 . 그것이 결국 ‘ 최씨 왕조 ’ 가 열리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다 . 으리으리하게 지었을 것이 분명한 그의 무덤이 지금 흔적조차 없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
800 여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 권력체계와 정치학문은 발달했을지 모르지만 , 인간 심리는 진화하지 않았다 . 권력 을 제대로 사용하고 , 또 더 큰 권력을 얻어내려면 믿음 , 즉 신뢰를 받아야 하는 건 지금이나 그때나 별반 다르지 않다 . 문제는 , 2023 년의 한국 정치에서 그 ‘ 신뢰 ’ 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
한국 정치권에서 균형 있는 정치분석가로 유명한 박성민 정치컨설턴팅 민 대표는 2023년 10월 19 일 한국방송( KBS) 시사프로 < 더 라이브> 에서 “ 윤석열 대통령이 ‘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 는 말을 남겼는데 대통령이 돼서는 ‘ 나한테는 다른 사람들이 충성했으면 좋겠다 ’ 는 생각을 보인 것 같고 , ‘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 ’ 라고 했는데 ‘ 당대표는 부하여야 한다 ’ 는 것처럼 비치게 했고 , ‘ 수사권을 가지고 보복하면 깡패지 검사냐 ’ 는 말도 인상 깊게 남았는데 당대표 (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 를 윤리위에 회부해서 내쫓았다 ” 며 “ 대통령의 말이 변한다 , 반성한다는 이런 얘기가 신뢰도를 잃은 것 아니겠는가 ” 라고 말했다 .
여론조사는 어떨까 . 10월 19 일 발표한 한국갤럽의 주간 정례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평가는 30%, 부정평가는 61% 로 60% 대를 넘어섰다 . 윤 대통령뿐일까 ? 9 월 한국갤럽이 발표한 정치지도자 호감 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호감도 29%, 비호감도 61% 를 기록했다 . 이 대표의 비호감도는 중도 (58%), 무당층 (61%) 등에서도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 한국갤럽 여론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 ±3.1% 포인트 . 더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조 ) ‘ 역대급 비호감 대선 ’ 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탄식이 정치권 내부에서 계속 울려 퍼지는 이유다 .
윤 대통령과 이 대표 모두 최근 들어 ‘ 말 ’ 을 통해 신뢰와 통합 , 변화와 혁신을 강조한다 . 윤 대통령은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뒤 “ 국민이 늘 옳다 ” 고 했고 , 이 대표는 “ 체포동의안 처리 과정의 일로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길 바란다 ” 며 자신의 체포동의안을 가결한 ‘ 가결 파 ’ 를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 문제는 ‘ 행동 ’ 이다 . 행동이 뒷받침하지 않은 말은 공허하다 . 공허한 말은 결국 신뢰 상실로 이어진다 . 신뢰 상실은 권위 붕괴로 이어지며 , 권위 붕괴는 권력 행사의 걸림돌이 된다 . 800여 년 전 최충헌의 일화처럼 , 한두 번의 ‘ 말 ’ 만으로는 신뢰를 쌓을 수 없다 .
이도형 <세계일보> 기자*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언론사 정치부에서 국회와 청와대 등을 8년간 출입한 이도형 기자가 역사 속에서 현실 정치의 교훈을 찾아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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