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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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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공정·정의는 한 칸씩 옮겨야 한다

능력 세습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은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
기회는 공정하고 과정은 정의롭고 결과는 평등해야
등록 2021-07-17 23:41 수정 2021-07-20 10:34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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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에 나선 주자마다 공정을 기본으로 내세운다. ‘경쟁적으로’ 쓴다. 가만 들여다보면 공정하다는 감각, 혹은 착각을 편의적으로 갖다 쓰는 게 아닌가 싶다. 공정함과 ‘공정감’은 우울증과 ‘우울감’만큼이나 다른데 말이다.

공정은 언제부턴가 능력주의를 포장하는 외피로 작동한다. 출발선이 달라도 과정이 공정하면 감수하고 순응하라니. 능력주의는 특권과 반칙을 혁파하자고 시작됐으나 또 다른 특권과 반칙을 부르는 역설에 놓였다. ‘갖고 태어나게는’ 못해도 ‘만들어줄 수는’ 있는 사실상의 능력 세습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라는 말은 어쩌면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게 아닐까.

능력주의가 통용되는 방식도 모순적이다. 어느새 우리 사회는 같은 공개채용 절차, 특히 지필평가를 치르지 않은 이가 직장이나 시장에서 비슷한 지위를 누리거나 보상받는 상황을 못 견뎌 한다. 임금과 노동환경을 나아지게 하려는 당사자들의 활동은 ‘(객관적으로 능력을 입증할) 시험도 치지 않은 주제에’ 조직(사회)에 부당한 압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여긴다. 이들을 옹호하는 정치적 태도는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화르르 비판받는다. 공정으로 분칠한 능력주의는 기회의 불평등을 은폐하고 결과의 부정의를 옹호하는 쪽으로 작동할 위험이 크다.

‘능력껏 일하고 먹는다(보상받고 인정받는다)’는 능력주의의 취지는 어느 틈에 ‘능력에 따라 격차를 벌리고 차별을 감수한다’는 서열주의적 세계관으로 현실화했다. 양극화조차 당연해져버렸다.

정치의 역할이 절실하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정의당이 내놓은 청년기초자산제와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한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 김두관 후보(왼쪽)의 국민기본자산제, 정세균 후보(오른쪽)의 미래씨앗통장 등이 눈에 띈다. 적극 논의할 만하다. 미래지향적으로 베끼고 연구하고 따라 하고 토론하길 바란다. 기본소득제도 누구의 대표 공약이냐 아니냐, 발을 빼냐 아니냐 다툴 게 아니라 청년층부터 주는 식의 실천 가능한 다양한 방법을 머리 맞대고 모색해보면 좋겠다. 어차피 우리가 처음 실험하는 거다. 이 와중에 ‘작은 정부론’은 한가한 소리이다. 각종 지원으로 국민을 광범위하게 ‘사전 보호’하고 세제 조정이나 최고임금제 등으로 꼼꼼하게 ‘사후 보정’하는 행정의 역할은 점점 중요해진다.

능력주의를 표방하며 자신이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실제 더 불공정하고 편향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 착각 때문이다. 착각이 확신을 부르고 확신이 경계심을 풀어버린다. 우리는 586 엘리트를 중심으로 그 어느 정부보다 능력주의를 강조한 현 정부가 ‘무능’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봤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이 가능하리라 믿은 것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순진했던 걸까 오만했던 걸까. 문재인 정권이 내걸었던 평등과 공정, 정의의 슬로건은 애초 한 칸씩 옮겨서 추구됐어야 했다. 기회의 공정, 과정의 정의, 결과의 평등으로 말이다.

촛불 시민의 지지로 출발한 현 정권이 가장 먼저, 가장 뜨거운 합의로 뜯어고쳤어야 할 적폐는 교육이었다. 우리 교육은 적극적으로 능력주의를 가르치고 강화한다. 그 끝판왕이 입시다. 그런데 손도 안 댔다. 철학도 문제의식도 없었다. 완벽히 비었다. ‘조국 사태’로 입시 정책을 찔끔 손보는 척했을 뿐이다.

많은 이가 일터와 학교에서 자기 착취적 노동(학습)에 시달리는데도 성공은커녕 벼랑 끝 하락의 공포를 매일 견뎌야 한다. 이건 아니다. 더 늦기 전에 태클을 걸지 않으면 각자도생(제각기 살아나갈 방법을 꾀함)을 지나 공도동망(함께 넘어지고 같이 망함)이다. 다음 대통령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이면 좋겠다. 교육 대통령이라 불러도 좋겠다. 삶이 어렵고 힘든 건 능력이 없어서라는 말을 더는 듣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기득권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세상이 평평해지는 것이다. 세상을 평평하게 만들려는 이들이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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