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린 2020년은 아니었다. 우리 삶을 더 높고 밝은 곳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싸움 또한 지속됐다. 장애나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말자며 ‘차별금지법’을,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을 무자비한 착취 대상으로 삼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한 2020년, <한겨레21>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한 취재원과 필자 19명이 ‘올해의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보내왔다. _편집자주
대검찰청을 상대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국정감사가 열린 10월22일. 검찰 안팎에선 일찌감치 오늘을 앞두고 “윤석열 총장이 국감에서 폭탄 발언을 내놓는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며칠 전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 총장을 라임·가족 수사에서 배제하는 두 번째 수사지휘권까지 행사했는데, 윤 총장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편파 지휘” “중상모략” 등 험악한 말을 주고받으며 강을 건넌 사이라 어떤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1년 가까이 지긋지긋한 막장 드라마를 이어가던 ‘추-윤 대결’의 분기점이 될 적당한 무대가 마련된 셈이었다.
예상대로 작심 발언이 쏟아졌다. ‘한마디 한마디’를 발라내면 모두 기사 한 꼭지가 될 법했다. 윤 총장은 “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고 했고, 심지어 추 장관의 수사 지휘가 “위법·부당”하다고 했다. 예상마저 넘어선 답변은 국감이 거의 끝날 무렵 나왔다. ‘정치 참여 여부’를 묻는 질의에 윤 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퇴임하고 나면 우리 사회와 국민을 위해서 어떻게 봉사할지 방법을 천천히 생각해보겠다.” ‘추-윤 대결’의 귀결이 어디에 이르렀는지 말해주는 대답이었다. 국감은 ‘예비 정치인’ 윤석열의 데뷔 무대가 되었다.
흔히들 ‘검사가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비극’의 원인으로 추 장관의 거친 행보를 든다. 물론 그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2년의 우여곡절을 되새겨보면, 윤 총장을 키운 8할은 여권의 ‘비일관성’이었다.
법조 출입을 시작한 2019년 초만 해도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적폐 청산’의 선두에 있었다. 없던 4차장까지 신설해 몸을 불린 서울중앙지검은 ‘직접수사’를 최대치로 행사하고 있었다. 여권은 이때 ‘검찰의 직접수사가 과도하다’고 하지 않았고, ‘피의사실 공표가 과도하다’고 하지 않았다. ‘적폐 청산’ 수사의 주역들은 몇 개월 뒤 ‘조국 수사’의 주역이 되었다.
2019년 6월 윤 지검장이 검찰총장으로 지명되기 전후의 과정도 마찬가지다. ‘장모 관련 의혹’은 여당 의원들이 나서서 ‘윤 지검장 결혼 전 일’이라며 적극적으로 방어했다. ‘보수언론 사주와의 만남’도 여권에서는 이미 ‘아는 사람은 아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윤 지검장이 총장 후보 4명 중 한 명으로 추천되고 결국 총장으로 임명될 때까지 아무도 ‘징계감’이라며 해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인사청문회에서 한 여당 의원이 그에게 ‘사람을 가려 만나라’라고 한 게 그나마 직언한 편이었다.
윤 총장은 오늘 국감에서 <중앙일보> 사주와의 만남을 묻는 여당 의원에게 “선택적 의심이 아니냐, 과거에는 저한테 안 그러시지 않았냐”고 답했다. 여권의 비일관성이 윤 총장에게 정치적 자산이 된다는 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12월16일 문재인 대통령이 ‘윤 총장 정직 2개월’을 재가하고 추 장관이 사의를 표하면서 지난 1년의 ‘추-윤 드라마’가 끝나간다. 다가올 새해에 여권의 ‘검찰 개혁’이 대결해야 할 상대는 윤석열 개인이 아니라 누적된 여권의 ‘비일관성’일지도 모른다.
임재우 <한겨레>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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