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의 명예는 그의 상급자가 그가 보기엔 잘못된 명령을 그의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고수할 경우, 그 명령자의 책임을 떠맡아 이 명령이 마치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듯이 성심을 다해 정확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 관료가 이런 규율에 따르지 않거나 절제를 하지 못한다면 전체 국가기구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막스 베버 지음, 박상훈 옮김, 폴리테이아, 2011)
1919년 독일 뮌헨대학의 학생집회에서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학과 행정학 분야에서 현대의 고전으로 꼽히는 이 강연집에서 베버가 우려한 ‘관료의 무절제’가 최근 긴급재난지원금을 둘러싼 논쟁에서 벌어졌다.
통합당 의원조차 “관료가 틀 바꾸려 해선 안 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월29일 비공개 고위 당·정·청 회의부터 4월28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까지 문재인 대통령 소속의 집권당이자 21대 총선에서 180석(전체 의석의 60%)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을 상대로 긴급재난지원금의 보편적 지급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최종적으로 민주당의 승리처럼 보였지만, 그 사이 민주당과 대통령이 입은 내상도 만만치 않았다.
정치권에선 장장 31일 동안 이어진 홍 부총리의 반발이 대체로 부적절했다는 의견이 많다. 여당의 한 의원은 “예산 문제여서 국회에서 여야가 결정하는 게 맞는데, 홍 부총리가 지나쳤다. 100% 지급의 문제점은 지적할 수 있지만, 사회의 방향은 정부 관료가 아니라 국회 정치인들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대놓고 여당에 반대하려면 먼저 사표를 내야 했다. 대통령도 경질을 검토할 만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미래통합당의 한 의원도 “기본적으로 예산과 법안은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에서 결정하고 관료는 그 틀 안에서 집행한다. 집행 과정에서 일부 조정할 수는 있지만 관료가 그 틀 자체를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이번 사안은 속도가 중요했고, 코로나19의 실제 피해자를 가려내는 일이 쉽지 않았기에 일단 100% 지급으로 가는 게 맞았다”고 말했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예산편성 권한은 기획재정부에 있다. 국회는 독자적으로 예산을 늘릴 수는 없고 기재부가 짜놓은 총액 범위 안에서 조정만 가능하다. 그러나 여야 의원들은 기재부가 예산편성 권한을 가진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예산편성권은 입법권과 함께 의회가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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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꺾으면 일 못해” 번번이 관료 손 번쩍
기재부 관료들이 청와대나 여당에 반기를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8년 5월 관료 출신의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소득주도성장의 핵심 문제인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두고 충돌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김 부총리의 손을 들어주며 논란을 잠재웠으나, 결국 두 사람은 그해 11월 함께 물러났다. 앞서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2003년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이 법인세 인상과 노조의 경영 참여를 두고 갈등을 벌이다 비슷한 시기에 모두 교체됐다. 2004년 이헌재 부총리와 이정우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이 부동산 양도세 중과세를 두고 충돌했다.
홍남기 부총리가 이 정부 들어 정치권과 충돌한 것도 여러 차례다. 2017~2018년 당시 이낙연 국무총리의 국무조정실장을 지낼 때 국회의원 출신의 배재정 총리비서실장과 심각하게 갈등했다. 당시 홍남기 실장이 비서실 인사와 예산 권한까지 다 틀어쥐었기 때문이라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당시 배재정 실장은 이 총리에게 국조실과 비서실 사이에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요구했으나, 이 총리는 “관료들의 사기를 꺾으면 정부 일을 할 수 없다”며 사실상 홍 실장 손을 들어줬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이렇게 청와대와 관료, 집권당과 관료가 충돌하는 이유는 행정부 업무 권한에 대한 정치인과 관료의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관료는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 시절까지 정치(입법과 예산, 정책 결정)와 행정(집행)을 사실상 모두 지배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치권력이 시민의 대표인 국회와 정당으로 옮겨가면서 갈등이 벌어졌다.
정치학자인 정대화 상지대 총장은 “엘리트라는 기재부 관료들은 예산과 세금 정책을 자신들이 지배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는 박정희·전두환 독재정부 시대의 잘못된 관행이다. 민주국가에선 모두 의회가 결정한다. 문제는 한국의 국회나 정당 정치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해 민주화 이후에도 이 권한을 관료 집단인 기재부가 행사한다는 점이다”라고 지적했다.
예산과 세금 등 재정 운영 권한을 기재부가 쥐고 있기에 대통령이나 집권정당의 중요 정책이 기재부 손에 맡겨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노무현·문재인 정부에 참여한 한 정무직 공무원은 “선거로 뽑힌 정부와 여당이 정책을 만들어도 관료들이 이를 따르지 않으면 집행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에서 종합부동산세 도입을 추진할 때 현재의 기재부에 해당하는 부처의 담당 실장이 ‘부작용이 크다’며 반대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주권자가 뽑은 대통령이 추진하는 일을 직업 관료가 막아선 일이었다”고 말했다.
보수는 인사로 통제, 현 정부는 통제 의지 없어
이런 상황에 정치인들은 불만이 크다. 2019년 5월10일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와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당·정·청 을지로 민생현안회의’에서 관료들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이인영 대표는 “관료가 말을 덜 듣는다. 잠깐만 틈을 주면 엉뚱한 짓들을 한다”, 김수현 실장은 “(집권) 2주년이 아니라 4주년 같다”고 신랄하게 말했다. 이 내용은 한 방송사의 마이크에 녹음돼 공개됐다.
관료들의 청와대나 집권정당에 대한 저항은 노무현·문재인 정부 등 민주당 정부에서 두드러졌다. 정부의 다른 정무직 공무원은 “보수 정부에선 말을 안 들으면 당장 갈아치우지만, 민주당 정부에선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오히려 저항한다. 지난해 윤석열 검찰총장이 대통령이 임명한 법무장관 후보자에 대해 전면 수사에 나선 것도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정치와 관료 문제를 연구한 소준섭 국회도서관 조사관은 “1987년 민주화 이후 군, 경찰, 국가정보원 등이 뒤로 물러나고 법치가 강화되면서 관료들의 힘이 세졌다. 그래도 보수 정부는 인사를 통해 관료를 장악하려는 생각이 강한데, 민주당 정부는 관료를 통제하는 데 의지가 없다. 그래서 보수적인 관료가 민주당 정부를 만만하게 보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행정부 안에서 관료들이 이렇게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배경에는 최고위 정무직인 장차관을 관료들이 차지하는 것도 한 원인으로 꼽힌다. 노무현 정부 이후 첫 내각의 장관 가운데 관료 비율은 노무현 정부 19명 중 7명(36.8%), 이명박 정부 16명 중 6명(37.5%), 박근혜 정부 18명 중 6명(38.9%)으로 출신 경력 가운데 줄곧 1~2위였다. 다만 문재인 정부에선 17명 중 3명(17.6%)으로 줄었다. 반면 국회의원 등 정치인은 노무현 정부 3명(15.8%), 이명박 정부 1명(6.3%), 박근혜 정부 3명(16.7%)에 불과했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에서 5명(29.4%)으로 많이 늘었다. 더욱이 차관은 대부분 관료 출신이기에 장차관 전체로 보면, 관료 비율은 노무현 정부 이후 모든 정부에서 50~70%에 이른다. 사실상 내각이 관료에 장악돼 있는 셈이다.
“선출직이 장차관 맡아야” 커지는 목소리
그래서 점점 더 강력해지는 관료 집단을 통제하기 위해 행정부의 장차관을 집권정당 국회의원들이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실제로 의원내각제 국가에선 원칙적으로 행정부(내각)의 장차관을 의원이 맡게 돼 있다.
물론 한국의 정치 제도는 대통령중심제이지만 의원내각제 요소도 담고 있다. 이를테면 행정부에 대통령과 함께 총리가 있고, 국회의원이 장관을 겸직할 수 있는 것이 의원내각제 요소다. 국회의원의 장관 겸직을 활용해 대통령과 집권정당이 행정부에서 자신들의 정책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정치인 장관은 인사청문회 통과나 부처 장악, 대외 활동이 매끄럽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권분립이 엄격한 미국 대통령제에선 연방 의원이 장관직을 겸직할 수 없는 것과 대조적이다.
하승수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는 “장차관은 정무직이고 중책이기 때문에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맡는 게 훨씬 더 타당하다. (행정)고시 출신의 직업 관료가 장차관을 맡는 것은 민주정치가 아니라, 조선시대와 같은 관료정치”라고 비판했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선출직이 정부 고위직을 맡는 것이 민주주의 원리에 맞다. 다만 국회의원이 장차관을 제대로 하려면 역량을 갖춰야 하고, 집권정당의 인재가 집단적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식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장은 “다선 의원들은 장관으로, 초·재선 의원들은 정무 차관으로 간다면 업무상으로도 효율적이고, 차관 경험이 있는 장관 후보자도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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