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영한 지 몇 해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는 미국 드라마 (미국 <nbc> 1999~2006년 방영)은 백악관을 중심으로 미국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다룬 작품이다. 시즌2 제17회는 필리버스터 얘기다. 백악관이 어린이 보건 관련 법안을 추진한다. 그런데 여당의 한 상원의원이 특정 질병을 위한 추가 예산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다. 78살 고령의 이 의원은 해당 법안 표결 직전 필리버스터에 나선다. 그의 연설은 8시간 넘게 이어졌고, 백악관 참모들과 기자들은 주말을 앞두고 퇴근도 못한 채 언제 끝날지만 기다린다.
드라마에서 설명하는 미 상원 필리버스터의 규칙은 이렇다. “발언을 하는 동안은 발언권을 보장받는다. 곧, 말을 끊으면 안 된다. 먹거나 마실 수 없고,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를 뜰 수도 없다. 앉아선 안 되며, 물건이나 사람에 기대선 안 된다.” 이 상원의원은 엉뚱하게도 법안 내용이 아닌 요리책을 한참 읽다가, 마술 기법에 대한 책을 읽는다. 표결을 고의적으로 막기 위한 ‘무제한 토론’이다. 주제는 ‘아무거나’다.
고대 로마에서도 정치인 소 카토(기원전 95~45)가 적어도 두 차례의 필리버스터를 시도한 기록이 있다. 로마 원로원은 새벽이 되기 전에 모든 안건을 결론 내도록 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섰던 카토는 한밤중까지 연설을 이어가려 하다가 한 차례는 성공, 한 차례는 실패했다.
영국은 의안과 관련된 주제에 한해서만 ‘무제한 토론’을 허용한다. 의장이 발언을 정지시킬 수도 있다. 1874년 조지프 비거 하원의원의 장시간 연설은 아일랜드탄압법 통과를 막아내는 쾌거를 이뤘다. 2000년엔 야당이 하원에서 필리버스터를 하다가 총리의 질문 시간까지 뺏으면서 야당 대표의 중요 기회인 ‘영수 토론’이 무산된 적도 있다.
일본에는 ‘1m 가는 데 1시간’이라는 우보(牛步) 전술이 있다. 1992년 유엔평화유지활동(PKO) 협력 법안 등 문제 법안의 처리 시한을 넘겨 폐기시키려고 의원들이 일부러 느리게 걷는다. 2000년 뉴질랜드 의회에서 야당은 장시간 연설뿐 아니라, 통역 시간이 추가로 소요되는 마오리족 언어를 일부러 쓰거나 의원들이 1명씩 투표하러 나가는 방식으로 고용관계법 처리를 일주일가량 붙들었다. 2006년 프랑스 야당은 국영기업 민영화 반대를 위해 방대한 분량(13만7449건)의 수정안을 제출해 처리를 지연시켰다.
한국에선 1964년 김대중 의원(전 대통령)이 5시간19분 동안의 발언으로 동료 의원 구속동의안 처리를 무산시켰다. 1969년 박한상 의원도 3선 개헌안 저지를 위해 10시간15분 동안 반대 토론에 나섰지만, 처리를 막진 못했다. 유신 때인 1973년 ‘시간 제한’ 조항이 생겨 필리버스터가 불가능해졌다.
지난 11월28일 감사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새누리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표결 처리됐다. 민주당은 지난해 다시 도입된 ‘무제한 토론’을 의원 전원이 신청해 필리버스터를 시도했다. 강창희 국회의장은 “인사 관련 안건은 토론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오랜 국회 관례”라며 차단시켰다.
표결이 강행되자 다급해진 민주당 의원들이 선 채로 항의했지만, 표결은 이어졌다. 강 의장이 “투표 다 하셨습니까?”라고 묻자,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안 했다”고 했다. 잠시 뒤 강 의장이 다시 묻자, 이번엔 다 같이 “안 했다”고 했다. 강 의장은 자리에 앉았다 다시 일어나더니 “투표 다 하셨죠. 그럼 투표를 마치고 개표 시작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투표 용지를 들어 보이며 “투표할 거예요!”라고 외쳤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민주당은 ‘위법’ ‘날치기’라며 국회 일정 전면 보이콧에 나섰다.
정말 필리버스터가 목적이었다면, 전략이 아쉽다. 민주당 소속 의원 127명이 투표하는 데 각자 5분씩만 썼어도, 10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민주당은 강 의장이 관례를 들어 표결을 강행할 가능성을 예상했다고 한다.
김외현 oscar@hani.co.kr</n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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