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축구연맹(FIFA) 누리집의 회장 소개란을 보면, 제프 블라터(72) 회장에 대해 “모국어 독어, 다른 언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라고 적혀 있다. 5개국어다. 축구 강국들이 분포한 유럽과 남미를 상대하기에 이만큼 매력적인 도구도 드물다. 블라터 회장의 기자회견장은 그의 어학 실력을 뽐내는 자리다. 그는 질문하는 기자가 쓴 언어에 맞춰서 답변한다. 영어 질문은 영어로, 독어 질문은 독어로, 스페인어 질문은 스페인어로 답변하는 식이다.
그러나 블라터 회장은 질문을 받을 때 항상 통역기를 쓴다. 답변할 땐 벗지만, 다음 기자가 질문할 땐 다시 통역기를 쓴다. 기자회견 내내 이를 반복한다. 이런 태도는 자신의 모국어로 통역된 질문을 받겠다는, 곧 질문의 정확한 뜻을 파악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스위스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개막일인 지난 1월22일,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연설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오전 11시45분에 시작한 세션에서 약 24분 동안 연설했고, 5분가량의 대담에서 하나의 질문에 답했다. 아베 총리는 오후 5시45분부터 시작한 세션에서 약 21분 동안 연설했고, 약 10분 동안 3개의 질문에 답했다. 둘 다 영어로 연설했지만,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모국어, 곧 각각 한국어와 일본어로 했다. 질문은 모두 다보스포럼 창설자인 클라우스 슈바프 의장이 했다.
아베 총리는 질문을 받을 때 통역기를 썼다. 슈바프 의장의 첫 질문은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주변국의 반발을 사는 문제에 대해서였다. 통역기를 벗은 아베 총리는 “먼저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오해가 있어 간단히 이야기를 좀 드리겠다”더니, “야스쿠니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과 메이지유신 시기의 전쟁 때 숨진 이들도 모신 곳이다. 나는 나라를 위해 싸운 분들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손을 모아 명복을 빌었고, 이는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공통적인 자세”라고 했다.
아베 총리의 논리는 먹혀든 듯했다. 그가 “(일-중, 일-한 간에) 정상들이 만나서 이야기할 자리가 있기를 바라며, 나는 대화의 문이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다”고 하자, 슈바프 의장은 “오늘 오전 박근혜 대통령 강연 때 아베 총리가 직접 와서 경청한 것은 다보스 정신에도 부합하는 것 같다”며 추어올렸다. 일부 한국 언론이 아베 총리가 사전 협의도 없이 등장했다며 ‘스토커 외교’라고 비아냥댄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박 대통령은 통역기를 쓰지 않았다. 슈바프 의장은 “북한의 핵무기 이슈가 동북아 지역과 한국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있다. 경제적 관점에서, 어떤 사람들은 남북 통일이 이뤄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할 테고, 또 다른 사람들은 통일 때문에 생기는 미래의 비용 부담을 이야기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어 한다”고 영어로 물었다.
박 대통령은 미소를 머금고 한참 듣더니, 슈바프 의장의 말이 끝나자 마이크를 피해 “통일 이야기 말이죠?”(You mean, unification issue?)라고 속삭이며 확인하고는 답변을 시작했다. 그러나 “통일에 대해서, 그것이 장애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는데”라고 입을 뗀 것으로 보아 질문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진 않았다. 다만 어쨌든 통일 얘기가 나와서인지, 박 대통령은 최근 자신이 밀고 있는 이른바 ‘통일 대박론’을 변주했다. “통일은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 주변국 모두에게도 대박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칫 대통령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 멍하니 앉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통역을 마련하지 않은 청와대 참모들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신년 기자회견 때처럼 질문을 사전 조율한 걸까, 아니면 박 대통령의 영어 실력을 믿었던 걸까. 이참에 과감히 한국어를 다보스포럼 공식 언어로 추진해서 공식 동시통역을 마련할 배짱은 왜 없었을까. 한국어밖에 못하는 대다수 국민도 인터넷으로 생중계된 다보스포럼에 접근할 좋은 기회가 됐을 텐데.
다보스포럼의 공식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독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중국어, 아랍어, 일본어 등 8개 언어다. 아베 총리는 공식 동시통역의 수혜자였다. 일본어가 공용어인 나라는 일본 한 곳뿐이다. 한국과 북한 두 곳에서 쓰이는 우리말보단 적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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