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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문제는 상상력이다

등록 2013-10-19 14:17 수정 2020-05-03 04:27


2009년 2월께로 기억한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벨기에 작은 마을에 자리잡은 루뱅대학교 연구실로 한 사람을 찾아갔다. 1시간 남짓 이어진 대화 도중, 그의 입에선 “코뮤니즘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길”(A Capitalist Road to Communism)이란 얘기가 몇 차례 튀어나왔다. 마주 앉은 사람은 현대적 의미의 기본소득 모델 창시자로 이름난 필리프 판 파레이스 교수였다.

기본소득이란 일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일자리가 있든 없든 간에,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아무런 조건 없이 일정 수준 이상의 금전적 보장을 해주는 것을 말한다. 100여 년 전 서유럽의 노동자들이 일할 권리(노동권)를 쟁취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면, 이제 노동 참여 여부와는 무관한 소득권(생존권)을 전면에 내세우자는 취지다. 이 제도에서는 법적인 의미의 고용관계에 포섭돼 있느냐는 소득을 누릴 권리를 가르는 절대구분선이 아니다. ‘시민소득’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는 건 이런 배경에서다. 엄연히 일자리를 갖고 근로소득을 받는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주부, 학생, 심지어 백수까지도 공평하게 나라로부터 ‘월급’을 받는 셈이다.

공상 세계의 일처럼 비칠지도 모를 기본소득 제도가 화제의 뉴스로 떠올랐다. 이달 초 12만명이 넘는 스위스 국민이 생계가 가능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도입하자는 취지의 국민 발의를 한 게 계기다. 다달이 받는 기본소득 액수는 우리 돈으로 약 300만원. 현재 일부 나라에서 기본소득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는 정책이 부분적으로 시행되고는 있으나, 전 국민을 대상으로, 그것도 생계가 가능한 수준의 금액을 지급하자는 논의가 제도화 관문을 한 단계 넘어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당연히 논란이 분분하다.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는 첫 번째 관문이다. 이번에 나온 안대로라면, 기본소득 제도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돈은 스위스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 규모와 맞먹는다. 재원 마련을 위한 방안으로 소비세를 인상하자거나, 공적연금을 끌어다쓰자는 얘기가 나도는 것도 논란거리다. 되레 진보좌파 진영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기본소득 제도가 보수우파 진영 일부에서 ‘사회개혁’ 프로젝트의 하나로 진지하게 논의돼왔다는 과거 전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재정에 큰 부담을 지우는데다, ‘복지병’을 낳는 장본인으로 지목돼온 복지제도를 해체하자는 게 요지다. 촘촘하게 짜인 복지제도망을 해체하는 대신, 전체 구성원에게 일정액씩을 나눠준 다음, ‘그다음의 삶’은 오롯이 개인의 책임으로 넘긴다는 논리다.

그럼에도 스위스 국민의 담대한 행보는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사회의 모순이란 점점 더 적은 양의 노동력이 생산과정에 투입되면서도 점점 더 많은 사회적 부가 생산된다는 데 있다. ‘고용’ ‘일자리’에 뿌리를 둔 지금까지의 분배 패러다임이 어느덧 수명을 다해가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현 정부가 입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창조경제의 진면목이 연구·개발이나 창의성과 같은 ‘비물질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에 달려 있는 점 또한 분명하다.

아직 초보적인 복지제도망조차 마련하지 못한 우리의 현실과 복지제도의 재구성이라는 과제를 풀어야 할 스위스의 현실을 곧장 대비할 수는 없다. 다만 현대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물적 조건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면,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낡은 패러다임을 넘어설 상상력과 실험정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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