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뒤 첫 미국 방문은, 그를 수행했던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이 오래도록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범죄’를 저지른 탓에, 완전히 허무개그로 끝나버렸다. 역대 대통령은 으레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선 밖에서 거둔 ‘치적’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데 열을 올리곤 했다. 여야 지도자를 청와대로 초청해 방문 성과를 알리며 이해를 구하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이 모든 시나리오가, 박 대통령의 이번 방문에선, 말 그대로 헝클어져버렸다. ‘대형 사고’를 낸 뒤 미처 짐도 챙기지 못한 채 박 대통령 일행과 떨어져 허겁지겁 한국으로 줄행랑친 청와대 고위 간부의 기름진 얼굴을 떠올리는 국민에겐, 박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유창한 영어로 연설을 했느니,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만나 두 사람의 이름에 ‘축복’이란 뜻을 가진 단어가 공통적으로 들어갔다며 환담했느니 따위의 소식은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한동안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1위 자리를 지킨 주인공은, 아쉽게도 박 대통령이 아니라, 윤 대변인이었기 때문이다. ‘갑질’의 대명사로 지난주 내내 사람들의 공분을 샀던 남양유업 입장에선 더없이 고마운 은인인 꼴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성과를 톡톡히 챙기는 쪽은 오히려 재계다. 콧대 높은 재벌 총수들이 박 대통령의 방문길에 ‘조연’ 노릇을 마다 않은 채 대거 동행한 데 따른 보상이라고나 할까. 박 대통령은 지난 5월8일(현지시각) 미국 상공회의소 주최 최고경영자(CEO) 라운드테이블에서 80억달러 규모의 한국 내 투자의 전제조건으로 통상임금 문제 해결을 요구한 대니얼 애커슨 제너럴모터스 회장에게 “합리적인 해법을 찾아보겠다”고 화답했다. 박 대통령은 이에 앞서 가진 한국 경제인들과의 조찬간담회에서도 같은 내용의 건의를 받고 긍정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멀리 미국 땅까지 날아가 ‘투자’ ‘상생’ 따위의 그럴듯한 단어를 늘어놓는 재벌 총수들에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확실한 선물을 안겨준 셈이다.
박 대통령 취임 뒤, 재계는 노조를 길들이는 좋은 무기로 통상임금을 적절하게 활용해왔다. 잘 알려져 있듯이, 통상임금이란 회사가 노동자에게 정기적이고 일률적으로 지급하는 임금을 말하는 것으로, 연장·야간·휴일 수당이나 연차수당 등 각종 수당의 기준 노릇을 한다. 퇴직금이나 산업재해보상금 규모를 정하는 데도 요긴하게 쓰인다. 재계가 투자를 명분으로 박 대통령을 사실상 ‘압박’하고 나선 데는, 통상임금 산정 기준에 정기 상여금 등을 포함해야 한다며 노조가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이 잇달아 노동계 쪽 손을 들어주고 있는 사정이 있다. 실제로 지난해 3월 정기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 한국지엠 노조는 통상임금 반환소송에 나섰고, 1·2심 모두 노조 쪽이 승리했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주요 자동차·조선 업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법원의 판단대로 통상임금 범위를 확대해석할 경우, 기업 입장에선 인건비 부담이 늘어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법원이 전향적 태도를 보이는 배경은, 통상임금 범위를 현실에 걸맞게 넓히는 것이야말로 왜곡된 국내 임금체계를 바로잡는 과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다. 법률적 해석의 최종 기관인 사법부의 판단마저 무시하려 드는 재벌 총수들의 행보야말로, 윤창중 그 남자에 잠시 가려진 ‘워싱턴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지 알려주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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