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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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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 호더’ 벗어난 냥이의 취미 생활은

아파트 밖으로 나는 새를 향해 ‘채터링’ 하는 고양이 그리
등록 2024-02-16 19:50 수정 2024-03-15 17:23
그리가 아파트 창밖을 오가는 새들을 노려보며 턱을 떠는 ‘채터링'을 하고 있다.

그리가 아파트 창밖을 오가는 새들을 노려보며 턱을 떠는 ‘채터링'을 하고 있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면 새들이 날아오릅니다. 하루 중 이때가 나의 시간입니다. 현란하게 눈앞을 가로지르며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새들의 몸짓에 온몸의 피가 끓어오릅니다. 그들의 숨통에 송곳니를 찔러넣는 상상을 하며 턱을 빠르게 앙다물길 반복합니다. 절로 “까갹까갹” 하는 소리가 새어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를 ‘고양이가 사냥감을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발현하는 행동’이라며 ‘채터링’이라 이름 붙입니다.

20층 아파트의 17층에서 내다보는 창밖 풍경은 늘 멀고 단조롭습니다. 하지만 동틀 녘과 해거름에 소용돌이치는 새들의 먹이활동이 몸속 깊은 곳에 자리한 야생의 기억과 본능을 일깨웁니다. 이 공간을 함께하는 집사들은 나를 ‘그리’라 부릅니다. 어려서 뛰기보단 자리에서 뒹굴기를 즐기는 것을 보고 ‘뒹굴이’라 부르던 것을 줄여 부르게 됐습니다.

이 집에 산 지는 5년이 좀 넘었습니다.

그리가 여행용 가방 위에 앉아 쉬고 있다.

그리가 여행용 가방 위에 앉아 쉬고 있다.


2018년 10월 태어난 지 한 달이 채 못 돼, 차에 실려 대전으로 입양을 갔습니다. 한데 입양자는 반려인이 아니라 ‘애니멀 호더’(Animal hoarder· 지나치게 많은 동물을 기르는 사람)였습니다. 온갖 파충류와 나와 같이 다리가 짧은 고양이 품종인 ‘먼치킨’도 이미 여럿 있었습니다. 일정 영역을 차지해야 하는 고양이의 특성 탓에 충돌이 잦아지자 나를 파양했습니다. 다시 여러 시간을 차에 시달려 이 집에 왔습니다.

이때의 경험으로 낯선 사람이 두렵습니다. 몇 해가 지났지만 지금도 현관 밖에 인기척이 나면 집 안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줄행랑을 놓습니다. 옷장 구석 옷 사이에 숨고, 가방 속에도 들어갑니다. 상자나 봉투 속도 들어가 있으면 마음이 좀 놓입니다. 이 집 식구 외에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명절 때마다 집에 오는 큰 집사의 어머니도 나를 본 적이 없습니다.

반려인뿐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친근하게 굴며 몸을 만지도록 내어주는 고양이를 ‘개냥이’라 부른다더군요. 그렇다면 나는 ‘아파트냥이’입니다. 독립적인 공간에서 서로 간섭하거나 지분대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는 게 좋습니다. 한식구 외에는 나의 존재조차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안전을 지키는 길이니까요.

그리가 비닐봉지 속에 들어가 밖을 보고 있다.

그리가 비닐봉지 속에 들어가 밖을 보고 있다.


우리 냥이는 산책도 즐기지 않습니다. 야생에서 살던 본능으로 한번 지나친 곳은 내 체취를 묻혀 영역 표시를 해야 합니다. 영역이 아닌 곳을 돌아다니는 일은 너무 위험합니다. 고양이과 동물이 먹이사슬 맨 위에 자리한 것은 이런 신중함과 날쌘 공격성을 두루 갖췄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높은 곳을 좋아해 ‘캣타워’ 오르기를 즐기는 습성처럼 오늘도 고층아파트 창으로 땅 위의 사람과 차를 봅니다. 이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습니다. 그리고 개와 늑대의 시간이 아닌 ‘새와 냥이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턱 떨림과 함께 까마귀 소리를 내며 새들과 소통합니다. 물론 창에 가로막혀 실제 사냥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시늉할 뿐이지만 피에 섞여 내려온 발성과 몸짓을 하며 자유를 넘어선 무언가를 느끼고 누립니다.

사진·글 이정우 사진가

*낯섦과 익숙함, 경험과 미지, 예측과 기억, 이 사이를 넘나들며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시각적 자극이 카메라를 들어 올립니다. 뉴스를 다루는 사진기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변신한 이정우 사진가가 펼쳐놓는 프레임 안과 밖 이야기.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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