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억 년이라는 지구 역사에서 ‘우리들’의 역사는 고작 20만 년에 지나지 않는다.
45억 년이니 20만 년이니 하는 시간의 길이는 둘 다 어마어마해서 실감하기 어려운데, 그때마다 나는 시간을 돈의 단위로 바꿔본다. 감이 확 온다. 45억원을 가진 부자와 20만원을 가진 빈자의 차이는 실로 아득하니까.
하물며 20만 년 전의 우리는 ‘지금의 우리’와 달랐다. 흔한 말로 원시인이었다. 동식물을 길들이는 농업혁명을 이루기까지 19만 년을 더 살아야 했고, 우리를 지금의 우리와 가장 가깝게 만든 산업혁명은 고작 200여 년 전에 일어났으니까.
길어야 20만 살에 불과한 우리들이 짧은 시간 안에 지구정복자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7만 년 전에 일어난 ‘인지혁명’ 덕분”이라고 말한다. 우리들, 호모사피엔스는 농업혁명과 과학혁명을 이루기 전에 인지혁명을 거쳤다. 인지혁명은 허구의 능력이자 상상의 능력인데, 사피엔스는 허구를 그냥 만들어낸 게 아니라 ‘믿게’ 했다. 가짜를 진짜처럼, 진짜를 가짜처럼. 이 능력이 45억 년의 지구 역사에 출현했던 모든 동식물과 우리를 가르는 기준이 됐고, 네안데르탈인 등 적어도 여섯 종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인류종 가운데 사피엔스가 승자로 남는 이유가 됐으리라고 하라리는 짐작한다. 상상력은 종교를 가능케 했고, 지도자와 공동체에 신성한 믿음을 부여했으며, 대규모 협력과 오늘날의 자본시장을 만들었다. 돈이라는 허깨비를 쌀과 아파트로 바꿔 생각하는 대수롭지 않은 능력을 우리 말고 누가 가졌단 말인가.
인간은 끝내 동물을 지배했지만, 앞서 오랜 시간 동물을 두려워했고 동물과 경쟁했다. 상상하는 능력 전후 우리가 바라보는 동물은 달라졌다. 우리는 동물을 먹잇감으로 여기면서도 신성함이 있다고 상상했고, 동물의 신성한 능력을 내려받은 지도자와 집단이 있다고도 생각했다. 동물은 (현실 속에서) 하찮아지는 동시에 (상상 속에서) 위대해졌다. 웅녀의 아들 단군 할아버지를 조상으로 여기는 한반도인들은 얼마나 미련하면서도 영특한 ‘곰족’의 후예인가.
사람과 동물을 뒤섞는 상상은 인류의 공통감각이 됐다. 3만 년 전 매머드 상아를 깎아 사람 몸에 사자 머리를 붙인 ‘뢰벤멘슈’를 만든 우리들과 사자·독수리·뱀·사람을 뒤섞은 스핑크스를 만든 우리는 다르지 않다.
이뿐인가. 시간을 쪼개어 동물을 덧붙이는 풍습이 동서양 모두에 있다. 12년 주기에 열두 마리 동물을 붙이고, 그해에 태어난 아기에게 동물 띠를 부여하는 관습은 생각할수록 재밌다. 그 가운데 용은 본 적도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2024년 용의 해라던가. 우리 집이라는 개천에 용이 세 마리 산다. 내 아버지와 내 두 딸에게 용의 피가 흐른다. 이 말은 거짓인데도, 반쯤 믿는다. 나 호모사피엔스의 능력은 거짓을 사실처럼 말하고, 심지어 믿는 데 있으므로.
노순택 사진가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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