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퀴즈는 대개 재미난 함정을 품고 있다. 상식과 지식을 오묘하게 버무려 ‘아, 뭐더라’ 하는 궁금증을 일깨우고, 맞히건 틀리건 작은 탄성을 자아낸다. 너무 어려워도 쉬워도 함정은 사라진다. 1973년에 시작해 지금까지, 무려 50년 넘도록 살아남은 프로그램 <장학퀴즈>에도 그런 재미난 문제가 많았다. 기억에 남는 퀴즈 하나.
“다음은 시인 노천명이 1930년대에 지은 시의 앞부분입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짐승은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데요. 이 짐승은 무엇일까요.”
나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먼저 튀어나온 건 “기린! 아, 아니다. 타조인가?”였다. 알겠지만 정답은 ○○이다.
2000년대 초, 평양을 방문했을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자랑해 마지않는 아리랑축전을 관람했다. 10만 명이 펼치는 집체극은 북한의 문화예술 역량을 총동원한, 오로지 북한에서만 가능할 법한 놀랍고도 어이없는 종합예술이었다. 먼저 오늘의 북한 사회를 건설하며 겪은 고난과 투쟁의 역사가 대서사시처럼 웅장하게 펼쳐진다. 장엄하다 해야 할지, 끔찍하다 해야 할지 말문 막히는 풍경이다. 이어 오늘의 지상낙원이 펼쳐진다. 그리고 인민의 낙원을 지키기 위한 내일의 다짐과 과제가 제시된다. 인민을 먹이는 것이 중요한 숙제였기에 ‘식량 증산’을 강조한 장면도 자주 눈에 띄었다. 쌀과 콩이 나오는가 하면, 소 돼지 토끼 염소 등 낯익은 가축이 뒤를 따랐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눈길을 붙든 동물이 있으니, 타조였다. 수만 명의 인민이 색깔카드로 거대한 타조를 그리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안내원 선생에게 물었다. 핀잔 섞인 설명이 날아왔다.
“거, 노 선생은 그런 것도 모릅네까. 타조는 버릴 게 하나도 없는 귀한 동물입네다. 털이면 털, 가죽이면 가죽, 고기면 고기, 알이면 알, 머리부터 발끝까지 버릴 게 어디 있습네까. 우리 장군님께서 일찍이 타조의 유용함을 깨달으시고… 거, 노 선생 공부 좀 더 하시라요.”
머나먼 아프리카에 살던 타조를 다목적으로 먼저 키우기 시작한 곳은 중국이었다. 1990년대의 대기근을 ‘고난의 행군’으로 겨우 버틸 때 김정일의 지시로 중국에서 타조를 모셔온다. 타조의 별난 부산물과 북한의 섬세한 공예술이 만나자 ‘달러’가 만들어졌다. 1998년 평양 외곽에 55만㎡의 대형 타조목장이 세워졌고, 마침내 외래동물 토착화에 성공했다. 이제 타조 수출까지 모색한다니 놀라운 일이다. 고로 타조는 자신의 털과 고기와 뼈와 알을 모조리 공화국에 바친 영웅이었다. 이토록 쓸모 많아 슬픈 짐승이라니.
2006년 여름, 김포 들녘을 걷다가 타조떼를 만났다. 타조농장이었다. 큰 새의 유용함이 북한과 토씨 하나 다를 것 없이 적힌 안내판을 만났다. 녀석들은 철조망 밖으로 긴 목을 빼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시의 첫 소절.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정답을 알면서도, 계속 틀리는 버릇이여.
사진·글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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