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piao@hani.co.kr
“한완상은 간첩이다.”
아득했다. 이 말을 내뱉는 공안 검사의 표정이 조금이라도 풀려 있었다면, 그렇게 절망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검사 특유의 반듯한 외모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는 현직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간첩이라 부르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서울지검 출입기자 때의 일이다. 인사차 찾아간 검사실에서 나는 반듯한 외모의 절망 하나를 만났고, 곧 한없이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근거를 대지는 않았다. 그저 “확신한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으로 살아온 한완상 전 부총리가 간첩으로 전락하고 마는 이 인식의 간극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게 바로 ‘공안 마인드’인가. 그 기발한 ‘공안적 상상력’과 섬세한 ‘공안적 감수성’에 아득할 뿐이었다.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불온한 마인드도 종언을 고하길 바랐다. 그런데 아니었다.
“송두율은 간첩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또 한 명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이 간첩으로 낙인찍혔다. 이번엔 팩트가 있다고 했다. 2003년 검찰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임명돼 활동한 혐의(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의 간부 및 지도적 임무 종사)로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를 구속기소했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이나 법리에 근거하기보다는 공안 마인드를 앞세운 처사로 드러났다. 이듬해 항소심 재판에서 서울고법은 송 교수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핵심 공소사실을 뒷받침할 증거가 미흡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송 교수의 밀입북 혐의만 유죄를 인정해 집행유예로 풀어준 것이다. 그리고 지난 4월 대법원은 독일 국적의 송 교수가 북한을 방문한 행위는 국가보안법의 탈출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추가로 무죄판결을 내렸다. 기존 판례까지 변경한 이 전향적 판결이 10년 만의 보수 집권기에 나온 점은, 공안 마인드에 젖지 않은 법원의 이성에 한 가닥 기대를 걸게 한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 사회의 유구한 마녀사냥 전통에 제동이 걸리는 건 아니다.
“임동원은 간첩이다.”
최근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씨는 한 주간지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간첩이라는 주장은 내 나름대로 상당히 공들인 수집정보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나는 그의 간첩 혐의를 입증할 만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매우 힘들고 위험한 작업을 감수했다. 그 정보들은 90% 이상 신뢰할 만한 것들이다.” 팩트와 확신이 어떻게 버무려진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김씨는 미국으로 망명한 상태. 임 전 국정원장은 이 주간지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냈다. 통일원 장관에 이어 전직 정보기관 수장까지 간첩 리스트에 올려놓는 공안적 상상력의 가벼운 비상에 탄복할 따름이다. 그리고 10년 만의 보수 집권기에 그런 상상력이 광우병 쇠고기처럼 몰려들지 않을까 걱정할 뿐이다. 이렇게 말이다.
“촛불시위 배후는 간첩이다.”
하기야 이 정도 얘기는 싸구려 상상력이나 둔한 감수성에 기댄 개나 소도 능히 할 만한 것이다. 하나 이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상상의 지평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수만 개의 촛불을 길거리로 불러낸 게 누구인가, 하는 간단한 추론만 더해진다면. 다만, 풍자적 상상력은 공안 검사처럼 반듯한 외모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므로 다소 흐트러진 모습으로 얼굴을 깨뜨려 크게 웃으며 말하면 족하다.
“이명박은 간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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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9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