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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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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금시대 열어젖힌 순금 대못

미국 남북전쟁 뒤 1869년 개통된 대륙횡단철도… 투기·사기·횡령 등 온갖 경제범죄의 원형 들어 있던 기업과 투자자들의 오락게임 그리고 시작된 날강도 귀족의 시대
등록 2015-06-19 16:32 수정 2020-05-03 04:28

대못이라고 죄다 저주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극진한 대접을 받는 귀하신 몸도 있다. 미국 중서부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북쪽의 프리먼토리서밋이란 곳에 박힌 대못이 그렇다. 순금으로 만든 대못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단다. ‘이 철도가 거대한 두 대양을 묶은 것처럼 신께서 이 나라를 언제까지나 하나로 묶어주시길’. 대못이 박힌 자리는 드넓은 미국 땅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대륙횡단철도 건설공사 중 맨 마지막에 놓인 두 선로의 연결 지점이다.

누가누가 더 먼저 깔까?

1869년 5월 미국 중서부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북쪽 프리먼토리서밋에서 열린 대륙횡단철도 선로 연결 기념식. 공사를 맡은 센트럴퍼시픽과 유니언퍼시픽은 반대 방향에서 선로 건설을 시작해 속도 경쟁을 벌였다.위키피디아

1869년 5월 미국 중서부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북쪽 프리먼토리서밋에서 열린 대륙횡단철도 선로 연결 기념식. 공사를 맡은 센트럴퍼시픽과 유니언퍼시픽은 반대 방향에서 선로 건설을 시작해 속도 경쟁을 벌였다.위키피디아

누군가에겐 꿈이었고, 누군가에겐 돈다발이었으며, 또 누군가에겐 목숨과 맞바꾼 고된 노동이었다. 꿈과 돈다발, 노동, 이 세 단어가 하나로 녹아든 게 아메리카대륙의 신생국 미국의 대륙횡단철도 건설이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하나의 철길로 잇는 대공사는 19세기 중반 남북전쟁의 상흔을 지우기 위해 미국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국가 재건·화합 프로젝트였다. 고상하게 말하자면, 남북으로 갈려 피 흘려 싸운 나라를 다시 하나로 묶겠다는 숭고한 열망이 대장정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물론 그렇게만 본다면 순진하기 짝이 없다. 대륙횡단철도는 후발 산업화에 나선 미국 경제를 비약적으로 도약시키는 젖줄 역할을 맡을 운명이었다. ‘쇳물에서 자동차까지’. 최근 국내 대기업의 광고에 등장한 이 문구는 이미 100여 년 전 미국 땅에선 현실이었다. 철강에서 정유·화학(1870~80년대)을 거쳐 자동차(20세기 초)로 이어지는 미국 경제의 대약진 드라마는 1869년 대륙횡단철도 개통을 빼고는 단 한 줄도 써내려갈 수 없다.

일단 거품을 빼고 살펴보자. 요즘 세상의 잣대로 치자면, 한 판의 오락게임에 가까웠다. 경기 규칙은 싱거우리만큼 단순했다. 공사를 맡은 두 회사(센트럴퍼시픽과 유니언퍼시픽)가 각각 반대 방향에서 동시에 마주 보고 출발해 누가 먼저 선로를 까느냐 싸움이었다. 미국 땅 동서 길이 4천km 가운데 이미 철길이 놓인 미주리강 근처까지의 구간을 뺀 3097km 구간에서 흥미진진한 속도전이 펼쳐졌다. 두 회사가 담당할 공사 구간을 미리 확정해놓지 않은 탓이다. 그냥 앞만 보고 달려가 최대한 멀리까지 선로를 깔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나는 싸움이었다. 내가 꾸물거릴수록 상대방이 1마일이라도 더 내 쪽으로 전진하기 마련이다. (1869년 5월10일 마지막 선로가 놓일 장소가 프리먼토리서밋으로 결정된 것도 대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속도전을 벌일 유인은 충분했다. 세기의 경주답게 엄청난 ‘판돈’이 걸렸다. 정부는 공사 구간의 난이도에 따라 선로 1마일당 1만6천~4만8천달러의 공사대금을 두 회사에 차등 지급한다고 약속했다. 예를 들어 절벽을 깎아내고 놓은 선로는 평지에 개설한 선로보다 더 후하게 값을 쳐주는 방식이다. 하지만 공사대금은 맛보기에 불과했다. 두 편으로 나뉜 투자자들이 두 회사의 자존심 대결에 투자 형식으로 판돈을 건 이유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진짜 당근은 따로 있었다. 선로 1마일당 선로 주변의 땅 25km²를 공짜로 손에 쥘 수 있는 특혜! 드넓은 대륙에 넘쳐나는 공유지가 ‘경품’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는 무상으로 안겨주는 땅 면적을 통 크게 두 배로 늘렸다. 속도전을 더욱 부추길 심산이었다. 덕분에 공사 막바지에 이르러선 12시간 작업에 무려 16km를 전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참고로 역사 기록에 따르면 옛 몽골 기마부대의 최대 이동거리가 하루 70~80km였다고 한다. 당연히 말에 올라탄 채.)

왜소한 인간들의 생존게임

화제를 몰고 온 오락게임 속엔 협잡과 투기, 횡령과 사기 등 오늘날 익숙한 모든 경제범죄의 원형이 죄다 들어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회사 경영진은 친·인척을 끌어들이거나 심지어 본인 명의의 하도급 회사를 세운 뒤 건설자재를 납품시켜 이중으로 이득을 챙겼고, 평가회사는 공사 구간 난이도를 조작한 엉터리 평가보고서를 남발해 공사대금을 부풀려 신청하도록 방조했다. 사업의 진척 속도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타긴 했으나, 공사를 맡은 회사 주식을 사려는 묻지마 투기도 고비마다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이 모든 소란과 해프닝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그 안엔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깎아지른 듯 우뚝 솟은 험준한 산맥을 뚫고 위대한 자연에 맞서 꿋꿋하게 전진하며 철길을 내던 왜소한 인간 육체들. 역사를 만든 대공사답게 6년에 걸친 공사 기간 내내 수많은 노동력이 투입됐다. 남북전쟁의 상흔을 씻어내려 했다곤 하지만, 미국 본토의 노동자만으론 모자랐다. 절대적으로 노동력 공급이 달린 건 아니다. 대자연에 압도당하고 야생동물과 원주민의 공격에 노출되는 등 워낙 고된 작업이다보니 중간에 내빼는 노동자도 많았다. 다른 분야에 견줘 인부가 받는 품삯이 많지도 않았으니 그럴 만했다. 이럴 때 등장하는 손쉬운 ‘해법’이 바로 이주노동자다. 하루하루가 급한 처지인 경영진 입장에선, 속된 말로 부려먹기도 편하고 품삯을 후려쳐도 별 탈이 없는 이주노동자만큼 매력적인 카드는 없었다. 슬프지만 지구촌 어디에서나 작동하는 불변의 법칙이다.

대륙횡단철도 건설 역사는 특히 중국계 이주노동자의 활약상을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참 절묘한 타이밍이었구나 싶다. 중국계 이주노동력이 본격적으로 미국 경제사에 등장한 건 대륙횡단철도가 건설되기 10여 년 전 불어닥친 골드러시 때부터다. (‘forty-niner’란 단어는 1849년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 이후 서부로 급속하게 물려든 사람을 뜻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동요 의 가사에도 클레멘타인이란 이름의 딸을 둔 ‘forty-niner’ 광부가 등장한다.) 중국계 노동자들도 이때 금을 캐는 육체노동자로 캘리포니아 광산에 투입됐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뒤 골드러시 열풍이 잦아들었다. 이들에겐 새로운 일터가 절실했다. 내세울 거라곤 몸뚱이 하나뿐인 이들을 받아줄 곳도 없었다. 대륙횡단철도 공사판이 재빠르게 중국계 이주노동자를 빨아들인 건 아마도 예정된 운명인 듯했다. 혼란한 중국 사회에 실망해 낡은 화물선에 실려 광저우항을 떠났던 “자그맣고 새까만” 동양인 무리는 이제 공사 구간 중 최대 난코스였던 시에라네바다 산맥 2천m 화강암 절벽에 매달렸다. 아무도 선뜻 뛰어들려 하지 않은 작업이었다. 몸엔 폭탄 주머니 하나씩을 둘러맸다. 철길을 가로막아선 웅장한 절벽은 우렁찬 폭발음과 함께 조금씩 깎여나갔으나, 머나먼 이국땅에서 이름 없이 스러진 목숨도 부지기수였다. (이 대목에서 철강·화학 등 공장형 장치산업엔 유럽계 이민자가 상대적으로 많이 투입됐던 사실과 비교해봄직하다. 20세기 초 디트로이트 포드자동차 공장의 노동력 구성은 주로 루마니아계·이탈리아계·그리스계·러시아계 등 백인 유럽계 혈통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주노동자에도 엄연히 ‘급’이 있었던 셈이다. 무턱대고 자본주의 탓만 할 건 아니다. 옛 동독 시절 동독 공장에 일하러 온 ‘사회주의 형제국’ 출신 노동자들 사이에도 체류 요건 등 여러 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했다.)

미국 경제 기관차의 폭주
미국 워싱턴주 케너윅을 지나고 있는 기차. 미국은 대륙횡단철도 건설 뒤 동부 지역을 잇는 철도도 건설했다. 이 철길들은 미국의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위키피디아

미국 워싱턴주 케너윅을 지나고 있는 기차. 미국은 대륙횡단철도 건설 뒤 동부 지역을 잇는 철도도 건설했다. 이 철길들은 미국의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위키피디아

꿈과 돈다발, 노동으로 촘촘하게 짜인 이 모든 역사를 뒤로하고 마침내 철길은 뚫렸다. 두 대양은 막힘없이 하나의 철길로 이어졌다. 철길은 동쪽 대서양과 서쪽 태평양 사이를 내달렸다. 1869년 5월10일의 일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4년 뒤다. 요즘 용어로 따지자면, 미국 경제 영토에 기초적인 플랫폼이 하나 깔린 셈이다. 남미대륙 최남단을 한 바퀴 돌거나 내륙의 강이나 지천을 이용한 뱃길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세상이다. 이제 정유·화학 등 당대의 신산업 ‘콘텐츠’를 차근차근 플랫폼에 올려태우는 일만 남았다. 본격적인 자동차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산업 인프라가 탄생했다.

후발 산업화에 뛰어든 미국 경제는 대륙횡단철도 개통이라는 커다란 날개를 달았다. 그러곤 가뿐하게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숫자가 단적으로 말해준다. 훗날 경제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영국·독일·미국 세 나라의 산업생산은 1870년을 100이라고 가정했을 때, 1900년엔 각각 199, 321, 401로 늘어났고 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3년에 이르면 249, 526, 736까지 치고 올라갔다. 산업혁명의 진원지 영국의 상대적 정체가 확연히 드러나기도 하거니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한 미국 경제 기관차의 위용을 짐작하게 해준다. 프리먼토리서밋에 박힌 순금 대못은 도약대이자 기폭제였다.

그럼, 미국은 과연 하나가 됐을까? 순금 대못은 바람대로 미국 사회를 하나로 묶어줬을까? 남북전쟁의 상흔을 씻어내는 데 어느 정도 보탬이 된 건 부인하기 힘들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피 흘려 싸우던 남과 북의 미국 젊은이들은 공사판의 ‘동료’로 손을 맞잡았다. 그들을 갈라놓는 아무런 장벽도 없었다. 동서로 시원하게 내달리는 기관차의 굉음 속에 남북의 해묵은 갈등과 미움은 서서히 잊혀졌다. 철길은 미국 경제를 산업화라는 새로운 시대로 이끌었다. 과거는 잊으라며.

하지만 ‘새로움’의 진정한 의미는 전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남북의 젊은이들, 그리고 (비록 차별은 있었을지언정) 전세계로부터 몰려든 이주노동자들이 험한 공사 현장에서 서서히 ‘하나’로 엮여갔는지는 모르나, 일터 바깥 세상은 외려 그들을 하나로 묶어둔, 그들은 범접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거머쥔 막강한 힘의 논리에 따라 굴러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멋진 신세계’였다!

훗날 역사는 1870~90년대 약 20년 동안의 미국 사회를 ‘날강도 귀족’이 지배하던 세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륙횡단철도라는 최신 플랫폼을 장악한 건, 신산업을 잇따라 일구며 거침없이 돈을 긁어모은 신흥 부자들이었다. 평범한 미국인들이 하루에 채 2달러를 손에 쥐기 힘든 시절에, 1초에 2달러씩 부를 늘렸다던 석유재벌 존 D. 록펠러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철길은 ‘날강도 귀족’의 전리품인지도

마크 트웨인이 란 제목이 붙은 책을 세상에 내놓은 게 1873년이다. 날강도 귀족의 세상이 왔음을 성능 좋은 더듬이로 앞서 감지한 역작이다. 1860년대와 1870년대의 경계선. 1870년 이후 날강도 귀족이 창궐하는 도금시대로 이끈 건 1860년대 끝자락을 장식한 대륙횡단철도 개통이다. 흔히 1861~65년 벌어진 남북전쟁은 ‘기업이 승리한 전쟁’으로 불린다. 노예제 폐지 같은 슬로건은 단지 겉치레 장식일 뿐이었다. 공공연한 비밀이다. 남북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겠다던 대륙횡단철도 개통은 어쩌면 승자의 기념품이자 전리품인지 모른다. 순금 대못이 도금시대를 활짝 열었다. 묘한, 아니 가혹한 운명이다.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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