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포드의 집착, 히틀러의 애착

금융업과 운명을 함께해온 유대인, 그들을 비난한 ‘산업주의자’ 헨리 포드, 그의 사상을 좇았던 히틀러
등록 2015-08-05 16:16 수정 2020-05-03 04:28

‘자동차의 제왕’ 헨리 포드. 그의 손길은 자동차 분야에만 닿은 게 아니다. 세계 최대 산업복합체를 꿈꾼 포드 제국의 영토는 광활했다. 포드 이름을 딴 제철소에선 자체 소유 광산에서 캐낸 철광석을 녹여 자동차용 철강을 생산했다. 원료와 완제품을 부지런히 운송하던 철도회사와 물류회사도 모두 포드 계열사였다. 심지어 포드는 항공기 제조업에도 진출해 A4T란 이름의 여객기 모델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의 화려한 이력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대목은 ‘신문 발행인’ 감투다. 디트로이트 근방의 작은 마을 디어본 태생인 포드는 1920년 고향 이름을 딴 란 주간신문을 인수했다. 당대 최고 기업가 반열에 오른 포드는 이 ‘개인 미디어’를 무기 삼아 자신의 확고한 철학을 세상에 쏟아냈다. 뜻밖에도 포드가 겨냥한 주요 목표물은 월스트리트 권력. 그 가운데서도 유대인계 금융자본은 그의 최대 비판 대상이었다. 거듭된 고소·고발과 유대인이 중심이 된 포드 제품 불매운동으로 인해 1927년 문을 닫기까지, 는 미국 사회에서 반(反)유대인, 반(反)금융자본 운동의 거점 노릇을 했다. 유대인과 금융. 둘의 운명은 왜 한데 엮여야 했던 걸까.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 초판본(왼쪽). 히틀러는 헨리 포드(오른쪽)가 발행한 신문 <디어본 인디펜던트>(가운데)의 열렬한 독자이면서 포드의 사상을 추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 초판본(왼쪽). 히틀러는 헨리 포드(오른쪽)가 발행한 신문 <디어본 인디펜던트>(가운데)의 열렬한 독자이면서 포드의 사상을 추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유대인 금융 독점의 연유

1992년 8월9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막일. 대회 마지막 종목인 남자 마라톤 경기가 열렸다. 출발점 30여km 지점부터 시작된 가파른 고갯길을 지친 기색조차 없이 힘차게 내달리던 황영조 선수의 모습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또렷하게 박혀 있다. 훗날 언론은 바르셀로나 시내 남서부 지역에 있는 이 언덕의 이름을 따 황영조에게 ‘몬주익의 영웅’이란 칭호를 붙여줬다.

몬주익(Montjuic). ‘유대인의 산’(Mountain of the Jews)이란 뜻이다. 아주 오랜 옛날 이 언덕에 유대인들이 한데 모여 살게 된 사연이야말로 유대인과 금융이라는 두 단어를 잇는 비밀을 풀 실마리다. 단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시각이 아니라, ‘옛사람’의 잣대로 그 사연에 한발 다가서야 한다.

금융업의 모태는 대금업(대부업)이다. 그런데 돈을 꿔주고 이자를 붙여 되돌려받는 일은 원래 기독교 교리에 어긋났다. 인간이 돈으로 돈을 창조하는 행위라 만물의 창조자인 신의 섭리와 맞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설령 인간(노예)은 마음대로 사고팔지언정 돈놀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옛 서구 기독교 문명의 불문율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도는 절대로 대금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신의 섭리를 마음대로 어길 수 있는 자, 즉 ‘이방인’에게만 문호가 열렸다. 기독교 제국 안의 영원한 이방인인 유대인이 애초부터 대금업을 독점하게 된 배경이다.

사회가 원칙적으로 금기시하는 일을 담당한 까닭에 중세 시대까지도 대금업자들은 업신여김을 당했다. 심지어 대금업자의 주검은 동물의 사체와 함께 묻도록 했다는, 선뜻 믿기 어려운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게다가 대금업자들은 반드시 특정 지역에 모여 살아야 했다. 바르셀로나의 한 언덕에 몬주익이란 이름이 붙은 건 유대인 대금업자들의 집단 거주지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수시로 유럽 곳곳으로 내몰렸다. 보석(jewelly)의 어원을 유대인(jew)에서 찾기도 하는데, 방랑 생활에 익숙하다보니 어느 곳에서나 가치가 보장되는 금과 은, 보석을 유대인들이 늘 지니고 다녔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정설은 아니다. 다른 해석도 많다.)

어쨌거나 유대인들은 대금업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급전이 필요한 일반인들을 상대로도 돈장사를 했으나, 근세 이전까지 주된 고객은 성직자(저축)나 외국의 통치자(대출)였다. 교회 성직자가 맡긴 돈으로 사치스러운 소비생활을 하거나 전쟁에 돈을 펑펑 쓰는 외국의 통치자들에게 돈을 꿔주며 이득을 챙겼다. 초보적 형태의 중개 기능이다. 이런 방식으로 유대인들은 세속에 물든 성직자들의 재산을 불려주며 신임을 얻었고, 외국 돈을 거래하는 값진 경험도 쌓아갔다. 단순한 대금업을 넘어 금융업의 세계에 차츰 눈뜬 셈이다.

[%%IMAGE2%%]금융업 경쟁 시대의 개막

한껏 천대받던 유대인들에게 ‘악덕업자’ 이미지까지 덧씌워진 건 이 무렵이다. 행정조직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중세 사회에서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세금을 걷는 ‘징세도급인’(taxfarmer) 제도란 게 있었다. 고유한 행정업무인 세금 징수 기능 일부를 ‘민영화’한 구조쯤 되겠다. 특정 지역 또는 개인에 할당된 세금을 이들이 우선 납부한 다음, 사후적으로 주민들에게서 세금을 걷는 일도 흔했다. 요즘으로 치자면 카드·캐피털 회사 격이다. 금융 중개 기능에 능통한 유대인 대금업자들이 차츰 이 자리를 꿰차는 일이 늘어났다. 당장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일반인이 보기엔 사실상 ‘고리 대출’ 행위로 변질될 여지가 농후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서양 경제사의 판도는 십자군전쟁 이후 장거리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근본적으로 바뀐다. 본격적 금융업이 싹튼 것도 이때다. 이런 세상을 한번 상상해보라. 신대륙 발견 이전까지 최장 무역항로였던 이탈리아~네덜란드 노선을 한 차례 왕복하는 데 대략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이탈리아 항구를 떠난 무역선이 네덜란드 항구도시에 짐을 내린 뒤 수입품을 싣고 되돌아오기까지 자금은 꽁꽁 묶여 있었다. 무역업자 입장에선 돈을 떼일 위험도 그만큼 컸다. 해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인류의 ‘지혜’는 이 순간 빛났다. 바로 무역금융이라는 묘수를 찾아낸 것이다. 금융혁명! (이즈음 교황청은 실물교역을 수반하는 ‘진성어음’ 결제(할인) 업무는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견해를 공식화했다. 말하자면 금융의 세속화 선언이다!)

흥미로운 건 이 무렵부터 이탈리아 북부 도시를 중심으로 기독교 사회 주류 세력 가운데서도 금융업에 뛰어드는 움직임이 크게 늘었다는 사실이다. 수백 년에 걸친 유대인 독점 체제는 막을 내렸고, ‘경쟁 시대’가 찾아왔다. 교황청 전용 재산관리인으로 출발해 유럽 전역에 이르는 금융제국을 일구며 정경유착의 화신이 된 메디치 가문이 대표적인 신흥세력이다.

16세기 말 영국의 작가 셰익스피어가 쓴 에는 유대인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등장한다. 유대인 대금업자의 냉혹함이야 익히 알려진 사실이긴 하나, 그 밑바탕엔 사실 구세력(유대인)과 신흥 금융세력 사이의 묘한 긴장관계가 깔려 있기도 하다. (세상이 금융업을 비난하거들랑 그 화살을 슬그머니 유대인에게로 돌려라!? 근현대사 주요 고비마다 고개를 내민 단골 카드다.)

다시, 포드 이야기로 돌아가자. 자동차의 제왕 가슴속엔 왜 그토록 유대인과 금융을 향한 증오의 감정이 가득 찼던 걸까? 자수성가한 기업가의 머릿속은 왜 유대인과 금융은 악이라는 선입견으로 가득 찼던 걸까? ‘산업’혁명이란 단어 속에 하나의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산업혁명은 삶의 방식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바꾼 일대 사건이다. 산업혁명이란, 단순하게 말해, 전통 사회의 (놀고먹는) 지대 수취자 권력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실물을 만들어내는’ 집단이 꿰찬 권력 교체 사건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을 지켜본 당대의 사회비판가 카를 마르크스의 눈엔 ‘자본가 대 노동자’의 적대 관계가 가장 먼저 들어왔으나, 당대 사회의 주류 언어는 기업가(industrialist)와 노동자를 한데 묶어 ‘생산적 계급’이라 부르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 반대편엔 금융업자, 곧 ‘비생산적 계급’(이라는 딱지)이 있었다.

‘산업주의자’ 포드의 집착

‘금융 대 산업(실물)’의 대립 구도는 후발 산업화에 나선 나라들에서 유독 더 심한 편이었다. 산업생산의 급속한 확대가 국부의 원천이라는 집단적 믿음에 사로잡힌 까닭이다. 이미 세계의 금융 패권을 장악한 선두주자(영국)에 대한 경계심도 한몫했을 것이다. 특히 19세기 중·후반에서 1차 세계대전까지의 60년 남짓한 기간은 새로운 기술과 산업 분야가 잇따라 등장한 혁신시대이자 ‘창업(기술)자본주의’의 절정기였다. 록펠러(정유)-카네기(철강)-듀폰(화학)-에디슨(전기)-포드(자동차)로 이어지는 대하드라마의 주제는 단연코 ‘산업’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인생의 절반씩을 19세기 후반부와 20세기 전반부로 나눠 산 포드는 가장 완고한 ‘산업주의자’였다. 육체노동의 가치를 숭상하는 아일랜드계 후손이어서였을까. 그는 금융(타인자본)의 도움 없이 기업을 일구는 데 집착했다. 포드자동차를 세울 때 끌어들였던 초기 투자자 지분을 나중에 몽땅 사들이기까지 했을 정도다. 1914년 초 포드가 노동자 최저임금을 하루 2.34달러에서 5달러로 전격적으로 인상하자 월스트리트는 그를 일러 사회주의자라 맹비난했다. 그가 월스트리트에 맞선 무기는 누가 뭐래도 ‘생산적 계급’이라는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포드 역시 유대인과 금융을 무조건 동일시하는 오랜 ‘왜곡된’ 시선에서 결코 자유롭지는 못했다. 아니, 포드 스스로가 그런 시선을 확대재생산하는 데 앞장섰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당시 유대인 자본이 이미 월스트리트 권력의 핵심 축을 형성했을뿐더러 미국 사회가 월스트리트 권력의 폐해에 눈뜬 건 분명한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둘을 하나로 뭉뚱그릴 만한 아무런 논거도 정당성도 찾을 수 없었다. 포드의 전폭적 지원 아래 가 펴낸 글들은 단순히 금융자본에 대한 비판이라고만 보기엔 ‘수위’를 한참 넘어섰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산업화의 열망을 키운 또 한 명의 인물이 포드 추종자를 넘어 의 열렬한 독자였다는 데 인류사의 비극이 있다. 1923년 뮌헨 쿠데타에 실패해 투옥된 아돌프 히틀러는 감옥에서 ‘포드의 신문’을 탐독했다. 그가 옥중에서 집필한 엔 에서 추려낸 내용도 담겨 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 이전인 1920년대 포드와 히틀러의 관계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포드가 히틀러 세력에 자금을 댔다는 주장도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독일 내 포드 생산시설은 1933년 나치의 권력 장악과 함께 자연스레 나치즘을 떠받치는 물질적 기반으로 흡수됐다. 히틀러의 집무실엔 포드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1938년 가을 75살 생일을 맞은 포드에게 히틀러는 외국인으로선 최초로 독일 최고 명예인 대십자가 훈장을 수여했다.

히틀러가 사랑한 ‘포드’

1936년 몬주익 언덕에선 평화의 잔치가 열릴 뻔했다. 나치가 추진하는 베를린 올림픽에 반대하는 전세계 평화 세력들이 모여 ‘반(反)파시즘 대안올림픽’을 개최하려 했던 것. 하지만 때마침 스페인 내전이 발발해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만일 예정대로 인종주의에 맞선 평화의 잔치가 열렸다면, 1천 년 전 이 언덕에 격리돼 살던 선조 유대인들의 영혼은 다소나마 위안을 받았을까? 아마도 ‘절반’만일 것 같다. 반(反)유대인 정서는 금융업에 대한 불신 속에 똬리를 튼 채 오래도록 끈질긴 생명력을 온존하고 있어서다. 1%에 반대하는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의 외침 속에도, 사력을 다한 삼성(제조업)-엘리엇(투기자본)의 선전전 문구에도. 악은 유대인? 금융? 아니면 둘 다? 가혹한 운명이다.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