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피로 연구자’의 사회개혁

[첫 회]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필수적인 노동력, 계급 갈등의 폭발을 피하고 육체 한계의 연장·유지 위해 ‘피로’를 연구하던 과학자들
등록 2015-05-20 08:20 수정 2020-05-02 19:28

1883년 겨울, 이탈리아 토리노.
토리노대학의 한 실험실 풍경은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30대 중반의 교수는 본디 자연현상의 이치를 탐구하던 물리학자였다. 토리노 출신인 그의 이름은 안젤로 모소(Angelo Mosso). 실험실엔 나무판자와 가죽, 금속덩어리 등이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그는 세상에 없는 특이한 장치를 개발하는 데 골몰했다. 집념은 해를 넘겨 1884년이 돼서야 결실을 봤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신기한 물건에 ‘에르고그래프’(Ergograph)란 이름이 붙여졌다.

피로 측정 장치의 탄생
이탈리아 자연과학자 안젤로 모소(사진 안)가 만든 피로 측정 장치 ‘에르고그래프’. 모소뿐만 아니라 프랑스·독일·벨기에의 여러 자연과학자들이 인간의 동작을 해체하고 분석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갈무리, 위키피디아 갈무리

이탈리아 자연과학자 안젤로 모소(사진 안)가 만든 피로 측정 장치 ‘에르고그래프’. 모소뿐만 아니라 프랑스·독일·벨기에의 여러 자연과학자들이 인간의 동작을 해체하고 분석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갈무리, 위키피디아 갈무리

에르고그래프는 최초로 인간의 피로도를 재는 측정기구다. 말하자면, 체온계나 혈압계와 한 종족이다. 겉모양은 이랬다. 나무 테이블 위에 금속으로 만든 장갑이 단단하게 고정돼 있고, 장갑과 연결된 쇠줄에 금속 추가 테이블 아래로 매달려 있다. 오른손을 장갑에 집어넣은 뒤 반대편 추의 무게를 점차 늘리면, 자연스레 쇠줄이 손가락을 잡아당기는 구조다. 이때 인간의 근육과 신경에 전달되는 긴장 강도를 수치로 나타낸 게 바로 ‘피로곡선’이다. 그에게 피로란 ‘느낌’이기에 앞서 ‘크기’였다.

모소의 실험실은 한 괴짜 연구자의 고립된 섬이 아니었다. 프랑스 파리와 독일 베를린·라이프치히, 벨기에 브뤼셀 등 당대 유럽 대륙 곳곳의 대학 실험실에선 그와 코드가 맞는 여러 동료들의 연구가 비슷한 시기에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인간의 동작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해체·분석하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피로의 정도를 수치화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그들은 모두 자연과학자였다. 자연현상보다는 외려 인간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지닌 자연과학자. 훗날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제시한 기준에 따르자면, 실험실 밖 인간 세상은 이미 ‘자본의 시대’를 지나 ‘제국의 시대’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이쯤에서 시곗바늘을 잠시 한 세대 정도 되돌려보자. ‘자본의 시대’를 향해 거침없이 내달리는 ‘혁명의 시대’로. 질풍노도의 19세기 중반 유럽 대륙이 주 무대다. 한 세기 전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이 무렵 인간 세상의 모습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었다. 오랜 삶의 터전에서 하나둘 내몰린 채 굶주림에 지쳐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부랑민, 이름하여 ‘가난한 자’(the poor) 무리는 ‘노동자’라는 신인류로 재탄생했다.

새로운 질서는 그에 걸맞은 새로운 말(언어)을 필요로 하는 법. 새로 등장한 사회체제(사람들은 ‘자본주의’라 불렀다)를 옹호하는 사람이건, 그 반대편에 선 사람이건 간에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바야흐로 1850년대 후반, 마흔 줄에 접어든 자본주의 비판가 카를 마르크스에겐 아마도 ‘노동력’(Arbeitskraft)이란 단어가 그런 운명이었을 게다. 너무도 잘 알려졌다시피, 노동과 노동력의 개념 구분은 마르크스 사회경제 이론의 기본 전제다.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 제공하는 몫 이상을 자본가가 챙겨간다고 확신하던 그에게, ‘착취’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가 바로 노동력이었다.

사람이건 기계이건 무슨 상관?

하지만 노동력이라는 이 당대의 신조어엔 좀더 찬찬히 뜯어볼 만한 구석이 꽤 많다. 노동력. 노동과 힘(力) 두 낱말이 한데 합쳐진 파생어다. 훗날 세대는 19세기 중반을 엇갈린 욕망이 충돌하고 피가 난무하던 ‘혁명의 시대’로 기억할지 모르나, 사실은 ‘힘’, 정확히는 ‘에너지’가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힘을 발견하고 힘을 믿으며 힘으로 세상 질서를 설명하려 나선 사람들은, 뜻밖에도 당대 최첨단을 달리던 자연과학자들이었다. 흔히 열역학 제1법칙으로 명명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자연계와 인간계 모두를 아우르는 유일한 설명 원리 반열에 당당히 올라설 기세였다. 모든 동작, 곧 운동은 에너지가 서로 다른 형태로 바뀌는 과정일 뿐이라는 탄탄한 믿음 체계 앞에서, 심지어 인간이 행하는 노동과 기계의 작동을 구분하는 일조차 거의 무의미했다. 둘 다 힘(에너지)이라는 단일 원리로 환원될 수 있기에. 기계의 노동?!

이처럼 노동자를 기계에 종속돼 단순 작업을 반복하는 부속물로 만들어버린 자본주의의 냉혹한 질서와, 인간과 기계의 ‘노동’ 구분조차 무의미하게 받아들이는 담론 영역의 메마른 말은 보폭을 함께했다. 이 기준대로라면, 냉정하게 말해 노동력은 노동을 통해 물질(대상)에 전달되는 힘(Kraft), 보존되는 에너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세상이었다. (처음으로 노동력이란 단어를 사용한 1858년의 나, 이보다 약 10년 뒤 출간된 제1권에서, 마르크스 역시 당대 ‘에너지주의자’의 영향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이처럼 노동력을 단지 힘(에너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 구체적 노동을 행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이건 가축이건, 심지어 기계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랴. 일정한 양(크기)의 힘(에너지)을 쏟아내느냐만이 중요할 뿐. 자연스레 시야는 노동하는 ‘사람’에서 노동하는 ‘육체’(몸)로 옮겨가고 있었다. 세상은 감정과 의지, 존엄성을 지닌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영혼 없는 근육덩어리의 관점에서만 노동을 이해하고 토론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노동자. 그 이름은 더 이상 노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노동하는 육체에 가까웠다. 담론의 거울에 비친 냉혹한 ‘자본의 시대’의 민낯은 이랬다. 흥미로운 건 이 과정에서 게으름이나 나태 등 전통적 의미의 노동 거부 행위가 소리 없이 ‘증발’됐다는 사실이다. 당연한 이치다, 게으름과 나태는 의지와 판단력을 지닌 사람의 행동에 속하는 것이지, 육체의 반응에 속하는 게 아니다. 오직 육체가 지탱할 수 있는 ‘객관적’ 한계만이 중요해졌을 뿐이다.

체제의 장애물, 피로를 정복하라
19세기 영국 체셔에 있는 위드너스의 공장에서 매연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 산업화로 치닫던 때 노동력을 가진 인간은 기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위키피디아 갈무리

19세기 영국 체셔에 있는 위드너스의 공장에서 매연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 산업화로 치닫던 때 노동력을 가진 인간은 기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위키피디아 갈무리

육체의 한계는 머지않아 당대를 살아가는 뭇사람들 눈앞에 찾아왔다. 무엇보다 참혹한 현실이 세상을 향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열악한 작업장 환경 탓에 스러지는 노동자가 곳곳에서 속출했고,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 양대 계급”의 갈등의 골은 갈수록 깊어졌다. 세력을 넓혀가던 노동운동은 어느덧 체제를 위협하는 문턱에까지 다다랐다. 그 시절 자본주의의 역동성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철강·화학·전기·자동차 등 과거엔 없던 신산업을 잇따라 창조해내며 거침없이 앞으로만 질주하고 있었으나, 화려한 커튼을 한 꺼풀만 걷어내보면 그곳에선 한계에 다다른 수많은 ‘육체’가 심하게 앓고 있었다.

세상은 ‘해법’을 갈망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체제를 더 끌고 가기 위해서라도 해법이 필요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이 무렵 사람들의 눈길을 붙들어맨 열쇳말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피로’다. 당대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보자. 자본주의 이전 세상에서 게으름이나 나태가 의지의 박약함이나 도덕적 결핍에서 비롯된 노동 거부의 한 형태였다면, 육체가 중심이 된 세상에선 육체 능력의 객관적 한계, 곧 피로야말로 체제를 위협하는 최대 장애물이었다. 인간의 몸을 직접적인 분석 대상으로 삼은 생리학이라는 학문 분과가 화려하게 등장한 건 이런 배경에서다. 이제 육체는 해체되고 분석되며 측정되고 비교되는 사물이 되었다.

때마침 힘을 얻은 열역학 제2법칙은 영원할 것만 같던 에너지의 소멸 가능성을 직시하게끔 했다. 운동 중 소멸하는 에너지를 최소화하려는 자연과학자의 관심은,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에너지 보존 주체인 노동자(육체)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방안을 찾으려는 ‘사회개혁가’의 고민으로 자연스레 번역됐다. 인셉션! 현실적인 이유가 컸다. 자국 노동자들의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치열한 후발 산업화 경쟁에서 승리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 길이야말로 진정한 ‘사회개혁’이라고 믿었다. 앞서 예로 든 모소의 피로 연구는 이런 토양에서 쑥쑥 자라났다. 모소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닌 자연과학자들 스스로가 사회개혁가의 대열에 속속 합류했다.

이제 ‘사회문제’는 새롭게 정의돼야 했다. 19세기 후반 세상에서 사회문제는 더 이상 빈곤이나 범죄, 질병이나 계급 갈등 같은 낯익은 현상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과학이란 이름으로 빈곤이나 질병, 계급 갈등을 ‘객관화’하고 ‘중립화’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사람이 사라지고 육체만이 남은 세상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육체는 중립적이다!

진보 밑바탕엔 끊임없는 중립화

다만, 후발 산업화 경쟁을 함께 벌였다고는 해도, 독일이나 프랑스 등 대륙 유럽의 사정과 미국의 사정은 조금 다르기는 했다. 계급 갈등의 이해 당사자를 초월하는 중립성 신화가 유독 강했던 대륙 유럽에선 주로 관료나 학자들이 ‘사회개혁’의 주도권을 쥔 편이다. 상대적으로 국가 주도 산업화의 특성이 더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이에 반해,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도 인간 육체와 작업 동작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지만, ‘과학적 경영’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주된 동력은 관료나 학자보다는 기업가 진영에서 찾을 수 있었다. (미국식 ‘과학적 경영’ 이론과 대비되는 게, 이 시기 유럽에서 등장한 ‘노동학’이다.)

19세기 후반, 자본주의라는 신세계의 내적 한계가 처음으로 만천하에 폭로된 시절, 세상은 사회개혁의 목소리로 들끓었다. 노동시간은 단축됐고 작업장 환경은 개선됐다. 사람들의 영양 상태는 개선됐고, 질병의 위험도 예전보다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비스마르크 치하의 독일에서 최초로 재해보험제도가 마련된 건, 모소가 에르고그래프를 탄생시킨 1884년이다. 분명, 진보다. 인류 사회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다만, 그 한 걸음의 밑바탕엔 사회문제를 끊임없이 중립화·객관화하는 기제가 근본적으로 작동했음을 또렷이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각국은 앞다퉈 피로를 이겨낼 묘안을 찾는 데 골몰했다. 계급 갈등을 줄이는 카드가 무엇인지는 늘 논쟁 주제였다. 그 길만이 사회의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지름길이라 확고히 믿었기 때문이다. 육체의 신화는 여전히 세상을 지배했다. 특정 민족의 육체적 우월함을 강조하는 우생학은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사회개혁의 파고가 차츰 잦아들자, 이제 드디어 육체의 대결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은 어느덧 ‘제국의 시대’ 절정기 문턱이었다.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