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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를 드립니다

증표를 통화의 대용물로 사용한 ‘앨버타 프로젝트’ 구매력 부족분 메우는 국민배당으로 이어진 기본소득의 시원
등록 2016-01-14 17:05 수정 2020-05-03 04:28

대공황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1936년 8월. 캐나다 서부 앨버타주의 주정부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계획을 발표했다. 주민들에게 종이로 만든 ‘증표’를 나눠주고는 이것으로 1캐나다달러어치 물건을 살 수도 있고, 아니면 정확히 2년이 지난 뒤에 증표 한 장당 1캐나다달러꼴로 바꿔주겠노라는 약속을 내건 것이다. 말하자면 유효기간 2년짜리인 이 볼품없는 종이 쪼가리를 나중에 공식통화로 되사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인데, 여기엔 한 가지 특이한 전제조건이 따랐다.
화폐의 퇴장을 막으려

1936년 캐나다 앨버타주 정부에서 주민들에게 나눠준 ‘번영증명서’. 사회신용운동을 실험했다. 블로그 ‘Moneyness’ 에서 캡처

1936년 캐나다 앨버타주 정부에서 주민들에게 나눠준 ‘번영증명서’. 사회신용운동을 실험했다. 블로그 ‘Moneyness’ 에서 캡처

증표를 손에 쥔 사람은 일주일마다 반드시 증표 한 장당 1센트짜리 스탬프를 정부가 지정한 공식 판매처에서 구입해 증표 뒷면에 붙여둬야 했다. 만일 이를 어길 경우 그 증표의 ‘화폐가치’는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예를 들어 2주차엔 1장, 3주차엔 2장의 스탬프가 붙어 있는 증표만 가치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그저 휴지 조각일 뿐이다. 결국 104장의 스탬프가 빼곡하게 붙어 있어야만 2년 뒤 약속대로 공식통화인 캐나다달러로 교환받을 수 있는 셈이다.

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제도 시행 첫 달인 그해 8월, 증표의 최대 유통량은 24만캐나다달러(현재 가치로 환산해 약 900만캐나다달러)에 이르렀으나, 이로부터 채 2개월이 지나지 않아 이 가운데 60% 정도(약 15만캐나다달러)가 실물거래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화폐 역사상 가장 기괴한 실험이라는 평가를 받는 ‘앨버타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마치 대공황을 이겨낼 비밀병기쯤으로 과욕을 부렸던 걸까. 앨버타주 정부가 나눠준 증표의 공식 명칭이 ‘번영증명서’(Prosperity Certificates)인 건 무척 아이러니하다.

본디 화폐라 할 수 없는 증표를 화폐 대용물로 사용하는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많다. 예를 들어 특정 지역에 고립된 광산촌에서 증표가 화폐처럼 쓰이는 경우는 어느 나라에서나 흔하게 발견된다.

생활필수품을 구입하러 먼 지역에까지 다녀오기 힘든 오지의 노동자들은 회사 내 간이매점에서 물건을 구입하며 회사한테서 미리 받은 증표로 대금을 치렀고, 회사는 회사대로 노동력 이탈을 막는 효과를 톡톡히 거뒀다.

전쟁터에서도 증표는 자주 쓰인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그랬다. 제네바협약에 따라 각국이 합법적으로 설치한 전쟁포로(POW) 수용소에선 증표의 한 종류라 할 군표를 현금 대신 강제노동의 대가로 지급했다. 이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나, 도박장의 칩도 일종의 화폐 대용물이다. 이 밖에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쓰이는 수많은 종류의 지역화폐(LETS) 역시 해당 국가의 공식통화가 아닌데도 마치 화폐처럼 실물거래를 이어주는 매개 수단 노릇을 한다.

하지만 앨버타 프로젝트엔 또 다른 무엇이 숨어 있었다. 단지 증표를 활용한 대안화폐 실험에 그친 게 아니다.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 쉴 새 없이 시중에 흘러다녀야 마땅할 화폐가 집 안 장롱 속 금고나 예금기관(은행) 계좌로 퇴장(hoard)되는 걸 최대한 막아보자는 게 이 기괴한 실험의 속뜻이었다. 실물거래의 윤활유 역할에 필요한 양 이상으로 존재하는 화폐는 실물거래 영역으로부터 끊임없이 퇴장돼 오로지 가치(부)를 늘리기 위한 축적 수단으로 쓰이거나, 이자 수입과 투기 거품의 첫 단추를 꿰는 고약한 존재로 변질된다는 게 당시 앨버타주 정부의 믿음이었다.

그럴듯했다. 앨버타주 주민 입장에선 증표를 계속 쥐고 있다가 1센트를 내고 스탬프를 사서 붙이는 수고를 하느니, 차라리 원하는 물건을 사는 데 곧장 써버리는 편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증표를 건네받은 가게 주인 역시 마찬가지다. 스탬프를 추가로 구입해가며 손에 계속 쥐고 있느냐, 도매상한테서 물건을 구입하는 대가로 시중에 다시 풀어놓느냐의 판단은 전적으로 본인 몫이었다. 스탬프 구입 비용 1센트는 화폐 장기(!) 보유에 매기는 일종의 ‘벌칙금’으로 보면 된다. 벌칙금을 물기 싫다면 재빠르게 실물거래에 사용해버리는 게 백번이고 옳다.

기업가, 더글러스의 실험

앨버타 프로젝트의 기본 얼개를 이루는 게 흔히 ‘사회신용’(Social Credit)이라 불리는 비주류 경제이론이다. 192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싹튼 사회신용운동(Socreds)은 현실의 화폐경제 체제가 낭비적일뿐더러 폭력적·억압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며 영국(스코틀랜드)과 북아일랜드, 캐나다 등을 중심으로 점차 세를 늘려갔다.

이들은 무엇보다 화폐의 공공재적 본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기존 사회질서 아래 더 많은 일자리와 임금 인상에 힘쓰던 당대 사회·노동운동의 주류 흐름과는 전혀 다른 대안을 찾으려 했다. 구성원의 대다수를 이루는 농민들이 대공황으로 큰 타격을 입은 캐나다의 앨버타주는 사회신용운동의 에너지가 유독 강했던 곳이다. 1934년 창당한 앨버타사회신용당은 이듬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앨버타주 주의회 63석 중 무려 56석을 싹쓸이하는 기염을 토했다. 앨버타 프로젝트의 탄생 배경이다.

사회신용운동의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 존재가 한 사람 있었으니, 바로 영국 출신의 엔지니어·기업가 클리포드 휴 더글러스다. 1879년에 태어난 더글러스는 전기회사, 철도회사, 항공기 제작회사 등 당대 여러 핵심 산업 분야의 업체들을 두루 경험했고, 엔지니어임에도 기업 회계에 눈뜬 뒤 독학으로 경제이론을 깨친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그의 주된 배경이 기술 분야였다는 점은, 기업가(산업주의자)를 굳이 자본가(은행가)의 대척점에 선, 그리고 노동자와 ‘한패’일 수 있는 존재인 양 여기던 당대의 평범한 대중의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랜 현장 체험을 통해 더글러스의 머릿속엔 하나의 근본적 의문이 움텄다. ‘왜 상품가격은 늘 노동자에게 분배된 소득보다 높을까?’ 얼핏 매우 어리석은 질문처럼 보이나, 그렇다고 근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기업이야 투자했던 돈을 회수하려고 하므로 임금 몫에다 일정 액수를 더해 판매가격을 정하는 게 마땅할 터이나, 소비자(노동자) 입장에서 보자면 기업이 과거에 투자해 임금으로 나눠준 몫은 이미 써버렸을 것이기에 ‘사라진 존재’일 뿐이다. 결국 특정 시점에서 사회의 총구매력은 언제나 상품의 총가격을 밑돌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공급과잉과 구매력 결핍은 일시적·순환적 현상이 아니라 상수라는 얘기다.

더글러스의 경제이론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세이의 법칙)는 당대 고전학파 경제이론의 핵심 명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생산요소를 최대한 투입해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것이 지상 과제였던 산업화 단계에선 아무래도 소비(수요)보다는 생산(공급)이 경제의 향배를 절대적으로 좌우하기 마련이다.

어찌 보면, 더글러스는 인류 사회가 20세기 문턱을 넘어서면서 종래의 산업화(공급자) 패러다임과 서서히 결별해야 함을 일찌감치 깨우친 선구자라 할 만하다. 바야흐로 사회 전체의 구매력이 붕괴한 대공황은 그의 혜안을 여실히 증명해줬다. 1930년대 빛을 발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유효수요이론에도 1924년 출판된 더글러스의 대표작 의 흔적은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다시 앨버타로. 더글러스는 갓 출범한 앨버타주 ‘사회신용정부’의 핵심 자문관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했다. 정작 더글러스는 앨버타 프로젝트를 달가워하지 않았을뿐더러 갈수록 비판적 태도로 돌아섰다. 사회신용운동의 알맹이를 비껴가고 있다고 판단해서다.

앨버타주 정부 지도자들에겐 긍극적으로 화폐경제를 극복한 (전근대적!) 세상에 대한 원초적 열망이 강했다. 화폐란 오로지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 기능할 때만 그 존재 이유에 온전히 화답하는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앨버타주 사회신용운동이 점차 전통 세력(지주·수공업자)이 주도하는 길드사회주의나 보수우파 성향의 기독교 근본주의 쪽으로 방향을 튼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증표 유통 권력에 주목해

반면 더글러스의 관심은 화폐의 본성에 방점이 찍혔다. 화폐란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덜어주는 쓸모 있는 물건이기에 앞서, 국가(공동체)에 의해 강제되는 엄연한 사회제도(약속)라는 점이 그에겐 중요했다. 앨버타 프로젝트를 예로 들자면,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증표를 화폐처럼 유통시킬 수 있는 주정부(공동체)의 권력 자체에 좀더 주목했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존재인 화폐를 바라보는 두 갈래의 흐름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주류를 차지한 쪽에선 화폐를 거래 편의를 위해 개인들이 만들어낸 발명품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교환의 불편함을 덜어주는 매개 수단으로 장점이 가장 많은 금속(금·은)이 주로 화폐로 쓰이다보니 ‘금속주의’라 불리기도 한다. 한마디로, 화폐란 교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품이며, 따라서 사유재라는 얘기다.

다른 한쪽 갈래는 화폐란 사적 소유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권력(공동체)에 의해 유통이 강제된 하나의 사회제도(약속체계), 즉 공공재라고 강조한다. 화폐의 본성은 그 소재(금속)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봤기에 ‘명목주의’라고도 불린다. 더글러스의 견해는 비주류에다 이단적 성향이 강한 두 번째 갈래와 확실하게 맥이 닿아 있다.

어쨌거나, 더글러스가 구매력 결핍을 근본적으로 보완하려고 제시한 ‘해법’은 간결했다. 총구매력과 총상품가격을 일치시킬 것. 구매력 부족분만큼을 국가가 사회 구성원들에게 메워줘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 바로 ‘국민배당’(National Dividend)이다. 더글러스가 보기에 국민배당은 경제체제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그 자체로서도 정당한 근거를 지닌다. 최종 생산물에는 지식이나 자연자원 등 특정 개인의 소유가 아니면서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공동체의 공유자산이 기여한 몫도 엄연히 포함돼 있어서다.

단, 더글러스는 국민배당의 재원이 은행 시스템을 거치며 창출된 신용화폐(부채)가 아니라 정부의 화폐 공급이어야 함을 분명히 못박았다. 은행이 만들어낸 부채야말로 현실에서 구매력 결핍을 외려 은폐하는 땜질 처방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흔히 더글러스의 국민배당을 두고, 최근 화두로 떠오른 기본소득 개념의 원조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보편적 권리로서의 소득(생존권)을 전면에 내세웠거니와, 구매력 결핍분을 보완해 경제체제의 안정성을 높이는 대안으로 제시한 게 바로 국민배당 아이디어여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더글러스의 국민배당과 거의 유사한 내용의 정책을 실시하거나 검토하는 중이다.

다만, 더글러스가 말한 국민배당의 의미를 단순히 소득 보전 정책의 하나로만 축소시키는 건 잘못이다. 국민배당은 20세기 초반부터 쏟아져나온 비판적·이단적 화폐론 흐름의 자연스러운 연장이거니와, 현대 화폐경제 제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고민 끝에 나온 하나의 대답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기본소득 제도의 미래 역시 결국 ‘화폐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문제에 잇닿아 있다고 할 만하다. 분명 기본소득 제도는 기존의 복지제도를 외려 해체하는 명분으로도, 일자리 여부와는 무관한 소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수단으로도 두루 쓰일 수 있다. 좌·우파 모두에게 가능성이 열린 양날의 칼인 셈이다. 마치 한 세기 전의 사회신용운동이 걸어갔던 서로 다른 길처럼.

반유대주의는 우연일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화폐를 권력의 의지와 공동체의 약속으로 이해하려는 비주류적 경향은 후발 산업국가일수록 상대적으로 강했다. 이미 세계 금융 패권을 장악한 영국으로 금이 무한정 쏟아져 들어가는 마당에, ‘돈=금’이라는 익숙한 명제와 단절하는 데서부터 돌파구를 찾으려 한 탓이다. 독일과 일본이 대표적 예이고, 더글러스의 이론 역시 영국의 변방인 스코틀랜드에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현실의 화폐제도와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어느 순간 반유대주의라는 늪에 손쉽게 빠져들곤 한다. 화폐의 공공재적 성격을 누구보다 강조한 독일의 이론가 고트프리트 페더가 나치당 창당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단지 역사의 아니러니일 뿐인가? (심지어 페더는 원래 자신을 감시하던 비밀정보원 히틀러를 나치당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하긴, 더글러스 역시 반유대주의라는 꼬리표를 늘 달고 다녔다.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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