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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이 삽질했던 그 운하처럼

파나마운하 건설은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패권 이동 상징… 다음은 니카라과운하 건설할 중국의 세기?
등록 2016-04-07 15:20 수정 2020-05-03 04:28
1887년 파나마운하 건설노동자로 일했던 화가 고갱이 남태평양 타히티섬에 머물 때 그린 <타히티의 여인들>. 한겨레

1887년 파나마운하 건설노동자로 일했던 화가 고갱이 남태평양 타히티섬에 머물 때 그린 <타히티의 여인들>. 한겨레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 폴 고갱 하면 떠오르는 지명은 으레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이다. ‘혁명의 해’(1848년)에 ‘혁명의 도시’(파리)에서 태어난 팔자였을까, 사회주의 성향의 외할아버지 핏줄 탓이었을까, 아니면 저널리스트 아버지를 빼닮은 호기심의 발로였을까. 원주민의 건강미와 날것 그대로의 열대 자연환경에서 유토피아를 꿈꿨던 그의 타히티 생활은 강렬한 색채의 작품 속에 영원히 박제돼 후세에 전해진다.

가난뱅이 화가, 건설노동자로 두달살이

“문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고요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찾아 떠난다”던 고갱의 일생에서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한 토막이 중남미 파나마에서 보낸 짧은 시간이다. 1887년 그의 나이 39살 때다. 다섯 명의 자녀를 뒀으나, 손에 쥔 것이라곤 없는 무일푼 가난뱅이였고 창작 활동마저 여의치 않던 불우한 시절이다.

가족을 남겨두고 홀몸으로 떠나온 가난한 화가를 기다린 곳은 이국적 풍토 가득한 작업실이 아니었다. 그가 짐을 부린 곳은 거친 열대 밀림을 뚫고 길을 내던 미약한 인간들의 처절한 싸움터, 바로 파나마운하 건설 공사판. 자연이 갈라놓은 두 대양(대서양과 태평양)을 인간이 하나의 뱃길로 잇는, 숙명에 정면으로 맞선 노동이었다. 이곳에서 고갱은 화가가 아닌 건설노동자의 삶을 하루하루 버텨냈다.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풍토병인 황열병과 말라리아에 시달리다보니 건강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이 무렵 그가 파리에 남겨진 아내에게 띄운 편지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아침 5시30분부터 저녁 6시까지 열대의 태양 아래, 또는 빗속에서 땅을 파야 했소. 밤이면 모기들한테 뜯겨 먹혔지.” 결국 고갱은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미련 없이 희망의 땅 파나마를 등졌다. 쉴 새 없이 몰려들고 쉴 새 없이 짐을 싸는 막노동 잡부들의 행렬. 파나마운하 건설의 역사가 그랬다.

파나마운하.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을 수놓은 패권국가들의 거친 욕망을 빼고선 도저히 실현 불가능했던 거대 건설 프로젝트였다. 1881년, 첫 삽을 뜬 건 프랑스였다. 이미 프랑스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값진 경험과 자산이 있었다. 10년에 걸쳐 메마른 사막을 파헤쳐가며 수에즈운하를 건설해 아시아∼유럽 뱃길을 단숨에 7천km나 단축시킨 저력의 나라였다. 1869년의 일이다. 프랑스에는 이제 제2의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더군다나 프로이센과의 전쟁(1870~1871년)에서 져 커다란 상처를 입은 프랑스로선 국가적 자부심을 되살리려는 욕구가 강렬했다. “애국적 노동자는 동참하라”는 구호가 전국에 난무했다. 이국땅의 험한 공사판은 일종의 대리 전쟁터였다. 수많은 프랑스 노동자들이 기꺼이 바다를 건넜다. 고갱도 무리 중 하나였다. 물론 경쟁국에 앞서 세계무역의 혈맥을 장악하려는 경제적 동기가 가장 컸다. 1880년 12월 마침내 파나마지협에 운하를 건설하는 공사를 추진할 ‘대양연결운하회사’가 출범했을 때는 이미 10만 명 이상의 투자자가 몰려든 뒤였다.

하지만 자연의 힘은 인간을 압도했다. 수에즈운하의 영웅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건설의 최전선에 나섰음에도 좀체 속도가 붙지 않았다. 계획은 번번이 어긋났다. 대부분의 공사 현장이 정글 지역인데다 이곳을 흐르는 차그레스강은 우기에 아주 위험한 급류로 돌변하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유럽인들에겐 낯선 풍토병이었다. 당시만 해도 열대병 치료제가 개발되기 전이었다. 황열병이 창궐했고 장티푸스와 콜레라, 말라리아가 인부들을 사정없이 덮쳤다. 공포에 질린 유럽 출신 노동자들을 대신해, 점차 자메이카와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쿠바 등 인근 지역 노동력들이 대거 투입됐으나 사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7년 만에 공사를 끝낸다는 애초 계획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증명됐다.

프랑스, 풍토병 앞에 무릎 꿇다

결국 파나마운하 건설 역사의 전반부는 모두 80만 명의 투자자한테서 모은 자본금을 허공으로 날린 채 대양연결운하회사가 파산하면서 막을 내리고야 말았다. 1889년 2월의 일이다. 무려 2만2천 명의 노동자가 희생된 상태였다. 프랑스의 야심도 무릎을 꿇었다.

이제 미국의 차례였다. 1901년 집권한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텃밭인 중남미 지역을 통과하는 운하가 태평양과 대서양의 통제권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이라는 사실에 눈을 떴다. 몇 해 전 스페인과 벌인 전쟁에서 미국의 전함이 남미 최남단 케이프혼을 돌아 대서양에 도착하느라 큰 어려움을 겪었던 터라, 운하 건설을 지지하는 여론도 강했다.

누가 뭐래도 미국은 아주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미 19세기 중엽 뉴욕의 돈 많은 금융가들은 파나마지협을 가로지르는 파나마횡단철도 건설에 엄청난 돈을 댔다. 9천 명이 넘는 건설노동자의 목숨을 대가로 1855년 파나마횡단철도는 개통됐다(대서양과 태평양은 뱃길에 앞서 철길로 뚫린 셈이다). 철도 노선과 나란히 달리는 운하 건설에 필요한 자재를 수송하는 데 더없이 유리한 환경이었다. 고작 4천만달러. 미국 정부가 운하 건설 사업권을 프랑스로부터 인수하는 데 들인 돈이다.

(그러나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당시만 해도 파나마운하 건설 지역은 콜롬비아의 영토였다. 파나마라는 나라가 존재하기 전이다. 콜롬비아 정부가 미국에 운하 건설권을 순순히 넘겨주는 데 반대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아예 전함을 파견해 파나마 독립운동을 노골적으로 지원했다. 결국 1903년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한 파나마공화국이 탄생하고서야 비로소 미국의 계획은 완성됐다.)

공사엔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새로운 건축자재였던 콘크리트가 본격 투입된 영향도 컸다. 무엇보다 운하 구조를 수평식에서 갑문식으로 변경한 게 결정적이었다. 땅을 무턱대고 파내는 대신, 차그레스강을 콘크리트 둑으로 막아 해수면보다 26m 높은 인공호수를 건설하는 쪽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갑문을 통해 인공호수로 선박을 띄웠다가 반대편에서 다시 갑문을 통해 선박을 해수면으로 내려놓는 방식이다.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이라, 작업도 상대적으로 쉬웠고 비용도 절약되는 이점이 있었다.

노동자 2만8천 명 목숨과 맞바꾼 운하
파나마운하 태평양쪽 갑문 통로를 지나고 있는 컨테이너선. 한겨레

파나마운하 태평양쪽 갑문 통로를 지나고 있는 컨테이너선. 한겨레

마침내 태평양과 대서양은 하나의 뱃길로 뚫렸다. 뉴욕에서 남미 대륙 최남단을 돌아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던 2만900km 뱃길은 8370km 길이로 단숨에 줄어들었다. 항해 기간도 3주나 단축됐다. 전체 공사 기간은 첫 삽을 뜨고서 무려 33년. 6억3900만달러, 요즘 돈으로 200억달러 이상이 투입됐고 모두 합쳐 노동자 2만8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최대의 토목공사가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준공식이 열린 날은 1914년 8월3일. 그러나 인류사에 길이 남을 이날의 현장은 어찌된 일인지 주요 언론의 관심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전세계의 눈과 귀는 일주일 전 터진 제1차 세계대전 소식에 온통 빨려들어가 있었기에.

파나마운하의 길이는 77km. 갑문을 두 차례 거쳐야 하는 탓에, 배 한 척이 운하를 통과하는 데 대략 6~8시간이 걸린다. 하루에 통과 가능한 선박은 30척 정도다. 하지만 모든 배가 파나마운하를 통해 뱃길을 단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운하 폭이 33.5m에 불과해 선박의 폭은 32m를 넘을 수 없다. 선박의 최대 길이 역시 294m로 제한돼 있다. 파나마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박의 최대 크기를 파나막스(panamax)라 부른다. 현재 확장 공사를 진행 중인데, 공사가 마무리되면 파나막스는 폭 46m, 길이 499m로 늘어날 예정이다.

파나마운하는 파나마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하다. 배 한 척당 평균 5만4천달러의 통과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운하를 지나는 각국의 선박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수입이 파나마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에 이른다. 인근 중남미 지역이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릴 때도 파나마가 해마다 10% 이상 성장을 이어올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개통 당시인 1914년 연간 1천 척에 그쳤던 통행량도 어느새 1만5천 척으로 크게 불어났다.

물론 처음부터 파나마가 모든 혜택을 누렸던 건 아니다. 운하 건설에 막대한 자본을 댄 실질적 ‘주인’은 엄연히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1977년까지도 미국은 파나마운하 지대의 통제권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민족주의 열풍으로 파나마운하 통제권 환수 운동이 파나마 내부에서 거세지자, 1977년에야 비로소 미국-파나마 공동 통제 체제로 바뀌었고 1999년부터 국영 파나마운하공사가 모든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다.

세계무역의 혈맥 노릇을 하는 파나마운하는 20세기 들어 세계 질서의 패권이 미국으로 확실하게 넘어왔음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라 할 만하다. 프랑스의 야심은 새로이 떠오르는 패권국 미국의 기술과 자본의 장벽 앞에서 맥없이 물러섰다.

세계무역 뱃길은 이제 중국 손에
파나마운하에 이어 니카라과운하가 건설될 예정이다. 중국이 기술과 자본을 댄다.

파나마운하에 이어 니카라과운하가 건설될 예정이다. 중국이 기술과 자본을 댄다.

21세기, 이제 또다시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걸까. 2013년 6월, 파나마 인근 국가인 니카라과 의회에선 역사적인 결정이 내려졌다. 파나마운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북쪽 지대에 중국이 자본과 기술을 대는 ‘제2의 운하’를 건설하기로 최종 의결한 것이다. 50년 동안 니카라과운하 지대를 할양받은 장본인은 중국의 한 부호가 주인으로 있는 홍콩니카라과운하개발투자회사(HKND)다.

미래의 어느 날 파나마운하와 나란히 달리게 될 니카라과운하.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또 하나의 뱃길은 과연 ‘중국의 세기’를 널리 알리는 신호탄이 될까? 화가 고갱, 아니 건설노동자 고갱의 손길이 어느 곳엔가 묻어 있을 파나마운하가 100년 전 그랬던 것처럼.

최우성 토요판 에디터 morgen@hani.co.kr※‘최우성의 경제사談’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최우성 에디터와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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