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가에 가끔 나오는 나라가 있다고 들었어
무지개 너머 저 어딘가, 하늘은 푸르고
네가 꿈꿔왔던 일들이 정말 현실이 되는 나라
1939년 미국 영화사 MGM이 만든 뮤지컬 영화 주제가 (Over the Rainbow)의 첫 소절이다. 주인공 도로시 역할을 맡은 16살 소녀 배우 주디 갈런드는 단숨에 전세계를 매혹시킨 스타 자리에 올랐다. 영화는 1900년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의 지역신문 발행인인 프랭크 바움이 익명으로 연재하기 시작한 같은 제목의 동화를 원작으로 삼았다. 캔자스주에 사는 도로시라는 소녀의 모험담을 그린 이 작품은 영화뿐 아니라 TV 시리즈,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로 수없이 재탄생했다.
한 편의 동화가 시대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사랑받은 비밀은 무엇일까. 모든 연령대를 아우를 만큼 줄거리가 흥미로울뿐더러, 무엇보다 원작의 배경이 되는 당대 미국 사회의 생생한 현실이 은유와 풍자 속에 잘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흔히 ‘도금시대’라 불리는 19세기 끝자락의 미국 사회는 엄청난 부를 거머쥔 자본가·은행가의 권력에 농민·노동자의 삶이 질식당하는 처참한 현장이었다. 도로시 일행의 모험은 당대 주류 권력에 맞서는 민초들의 저항(혹은 저항을 향한 욕망)을 상징하는 문학적 장치로 해석됐다.
에 담긴 현실 은유이 작품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또 있다. 도로시 일행의 모험이라는 스토리 라인이 경제학의 영원한 주제라 할 화폐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어서다. 사회제도의 근간인 화폐제도가 어떻게 당대 사회계층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잉태했는지는 이 작품이 독자에게 진짜 전하고픈 주된 메시지다.
오늘날엔 지폐를 사용하는 게 너무 당연하게 여겨진다. 요즘 지폐는 소재가치에 상관없이 일정한 명목가치로 유통되도록 국가권력이 강제하는 화폐, 곧 법정화폐다. 예를 들어 5만원권 한 장의 법적 가치(명목가치)는 한국조폐공사가 5만원권 한 장을 제작하는 데 들인 물질적 가치(소재가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국가가 아주 특별한 종이에 그저 5만원이란 명목상의 값어치를 부여했고, 사회 구성원들은 그 ‘약속’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과거엔 달랐다. 화폐경제 역사의 페이지는 대부분 번쩍번쩍 빛나는 금속화폐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금속화폐가 널리 쓰이려면 화폐의 소재가 되는 금이나 은의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져야 한다. 금이나 은이 없는데 어찌 금화나 은화를 만들어 유통시킬 수 있을까. 자연재해나 대규모 전쟁과 같은 특수 요인을 제외한다면, 과거 경기변동이 대부분 금은의 공급 상황과 관련된 건 이 때문이다. 금이나 은의 공급이 달려 시중에 화폐가 부족한 현상, 즉 전황(錢荒)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업의 발달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솔로몬의 황금을 찾아 인도로 가는 뱃길을 개척하려 나선 일화도, 결국엔 상업경제의 진전을 가로막던 당대 화폐제도의 한계를 잘 반영해줄 뿐이다.
황금을 찾는 데는 실패했지만, 콜럼버스의 여정은 세계 경제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대사건의 전주곡이 됐다. 1545년, ‘개척자들’은 남미 볼리비아의 포토시에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은광을 찾아냈다. 당시 유럽 대륙에서 일상생활을 지배한 건 은화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 대륙 전체의 은 매장량을 훨씬 웃도는 규모의 은광이 발견됐으니 그 파장은 미뤄 짐작할 만하다. 이후 300년간 전세계에 은화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창구이자, 세계 역사상 최초의 기축통화라 불릴 만한 스페인 은화가 탄생한 순간이다. (은이 유럽 대륙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유럽에선 드디어 상업경제가 본격적으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포토시 은광 발견은 유럽인들에겐 축복이었으되, 인류사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줬다. 해발 4천m 고지에서 은을 캐내기 위해 ‘개척자들’은 아프리카 흑인 노동력에 눈을 돌렸다. 노예무역의 출발이다!)
이제 미국 이야기로 되돌아오자. 18세기 말 미국의 독립은, 화폐경제사의 관점에서 볼 때,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 은화와 영국 금화가 힘겨루기를 벌이던 시절에 발생한 사건이다. 그 때문에 화폐제도의 틀을 어떻게 짤 것이냐의 문제는 신생국 미국 정부가 당면한 최대 과제였다. 혼란을 막으려면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정해 이를 엄격하게 지키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 정부는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1 대 15로 확정하고, 이 비율을 지키는 선에서 누구든지 자유롭게 화폐를 만들어 쓸 수 있도록 허가했다. 금화와 은화, ‘두 개의 화폐’가 공존하는 상황, 이른바 복본위제도다.
금과 은, 복본위제도의 태생적 불안정성제아무리 땅덩어리가 크다 한들, 복본위제도는 딜레마 그 자체였다. 금과 은의 공급량에 따라 실제 교환비율은 이리저리 널뛰기를 되풀이했다. 마치 공식 환율과 암시장 환율의 관계나 마찬가지다. 1848~49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개발되자 공급이 늘어난 금의 시세는 떨어지고 은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은을 녹여 물건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0년 뒤, 이번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1858년 네바다주 컴스톡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된 뒤, 은의 가치는 다시 큰 폭으로 떨어졌다. 불안정한 화폐제도. 복본위제도를 채택한 초기 미국 사회의 숙명이었다.
눈여겨볼 대목은 금화와 은화의 팽팽한 힘겨루기가 미국 사회의 새로운 갈등 전선을 정확하게 반영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경제적 기반을 지닌 사회계층의 이해충돌이 금화 대 은화의 화폐전쟁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분출했다. 19세기 중반 남북전쟁 이후 서부 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미국 내 갈등 구도는 남북 대립에서 동서 대립으로 서서히 무게중심을 옮겨갔다. 한쪽엔 빚을 지며 서부 영토 개발에 뛰어들었던 농민들이, 다른 한쪽엔 건국 당시 이미 막강한 경제적 토대를 갖췄을 뿐 아니라 서부 개발에 대규모 투자금을 댄 동부의 자본가·은행가들이 있었다. 한쪽은 채무자였고, 다른 한쪽은 채권자였다.
화폐전쟁의 첫 불씨가 지펴진 건 남북전쟁이 끝나고 얼마 뒤인 1873년이다. 전쟁 중엔 전비를 마련하느라 미친 듯 돈을 풀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 풀린 돈을 회수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건 인류 역사의 ‘상식’에 가깝다.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시중에 풀린 돈을 회수해 물가 안정을 이루는 일이 급선무로 떠올랐다. 이에 미국 정부는 1873년 금준비금으로 달러를 발행하겠다는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금화를 직접 유통시키진 않더라도, 금과 맞바꿀 수 있는 달러가 화폐 역할을 맡도록 했다. 말썽 많던 복본위제도에서 금본위제도로 옮겨간 것이다. 서부는 경악했다. 한순간에 은이 엄연한 화폐 자리에서 쫓겨난 셈이다. 때마침 전례 없던 극심한 불황이 찾아들자, 서부인들의 눈엔 이 모든 게 은화의 퇴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였다. 금본위제도 채택은 미국 정부를 장악한 동부 특권 세력이 저지른 ‘범죄’로 비쳤다. 본격적인 화폐전쟁의 전운이 감돌았다.
1870~90년대 약 20년에 걸친 ‘도금시대’는 화폐전쟁의 서막에 가깝다. 이 기간 동안 극심한 부의 편중이 이뤄졌는데, 말 그대로 ‘금칠한’ 도금시대의 승자 자리는 당연히 동부 지역의 자본가·은행가 차지였다. 이들의 반대편엔 서부의 농민, 노동자로 구성된 초라한 패자들이 있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진 만큼, 이제 화폐전쟁도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마침내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으니, 바로 1896년 대통령 선거다.
진보주의의 실패로 돌아간 금과 은의 싸움대선 기간 내내 화폐제도가 가장 뜨거운 핵심 쟁점이었다.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36살의 하원의원 제닝스 브라이언을 빼고는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다. 그는 원래 1892년 네브래스카 오마하에서 탄생한 인민당(People’s Party) 활동가였다. 당시 서부 농민들은 철도회사, 유통회사 등 동부에 바탕을 둔 거대 자본의 독점적 횡포에 시달렸을뿐더러 이들에게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생존 기반이던 은화마저 퇴출된 터라 이들이 느끼는 실질 부담은 더욱 컸다. 때마침 1893년 극심한 불황이 미국 사회를 덮쳤다. 8천여 개 기업이 도산하고 농산물 가격은 폭락했다. 서부 농민들이 주축이 된 이른바 ‘인민주의자’들은 불황의 원인이 불충분한 화폐 공급에 있다는 믿음을 더욱 굳히게 됐다. 자유로운 은화 주조(Free Silver)를 통한 통화팽창만이 자신들의 부채 부담을 실질적으로 줄여줄 수 있으리라 봤기 때문이다. 이들 눈에 통화팽창을 억압하는 금본위제도는 동부 자본가들의 음모일 뿐이었다. ‘긴축에 반대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 인민당 소속 브라이언은 단숨에 공화당에 맞서는 진보 세력의 통합 후보로 떠올랐다. 도금시대를 거치며 권력을 쥔 금권정치 세력에 대한 전 국민적 반감이 커진 것도 한몫했다. 거대 정당인 민주당이 그에게 후보 자리를 맥없이 넘겨줄 정도였다. 1896년 7월 그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행한 후보 수락 연설은 ‘황금십자가 연설’로 널리 알려져 있다. “노동자에게 가시면류관을 씌우지 말고, 인류를 황금십자가에 못 박지 마라.”
치열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승리는 공화당, 아니 동부 자본가들의 몫이었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선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엔 느닷없이 금이 쏟아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잇따라 대규모 금광이 발견됐고, 획기적인 금 채굴 기술도 등장했다. 굳이 은을 화폐로 사용하지 않더라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만큼 화폐 공급이 빠르게 늘어났다. 금본위제도는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로 자리잡았다. 은화의 완전한 퇴장이자, 서부 농민과 노동자의 패배이며, 은화에 투영된 진보주의 이념의 몰락이었다.
프랭크 바움의 동화는 이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본 뒤 세상에 나왔다. 대체 왜? 아마 격렬한 화폐전쟁 시기를 살아간 민초들에 대한 헌사요, 실패한 저항에 대한 울분을 담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차근차근 줄거리를 되새겨보자. 어느 날 갑자기 도로시가 토네이도에 휩쓸려 날아간 곳은 오즈라는 동네의 서쪽 끝이다. 혼란에 빠진 서부의 이미지가 포개진다. 마녀의 은색 구두를 신고 길을 나선 도로시는 양철 인형(상공업, 노동자), 허수아비(농민), 목소리만 큰 사자(정치인)를 만나는데, 이들의 소원을 들어줄 마법사가 동쪽 끝(워싱턴DC)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노란 벽돌길’을 따라 여행을 이어간다. 금본위제도에 대한 은근한 조롱이다. 그러나 푸른색 에메랄드(금권정치)로 치장된 집에 갇혀 사는 마법사는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도로시의 ‘은색 구두’야말로 소원을 들어줄 신통한 물건이라고 고백한다. ‘은화가 대안이다!’
도로시의 모험은 허구가 아니다?창작동화의 형식을 띤 는 브라이언과 인민주의 이념에 대한 차분한 복기이자, 화폐라는 상징에 투영된 현실의 갈등에 대한 치밀한 묘사로 봐야 한다. 사실 도로시의 모험 이야기는 완전히 지어낸 허구가 아니다. 동화의 모티브가 됐음직한 사례는 여럿 있다. ‘콕시의 군대’가 대표적이다. 극심한 불황 한가운데 1894년 오하이오의 인민주의자 제이컵 콕시가 이끄는 농민·실업자 무리 1천여 명은 통화팽창을 요구하며 행정부와 의회가 있는 워싱턴DC를 향해 마차나 자건거를 타고 행진했다. 미국판 ‘희망버스’라 불림직한 콕시의 군대 행진 모습에선 마법사가 살고 있는 동쪽 끝을 찾아가는 도로시 일행의 여정이 슬그머니 포개진다. 대공황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주류 권력을 향한 분노가 여전히 끓어오르던 1930년대 말, 할리우드 자본이 재빨리 를 재포장해 세상에 내놓은 건 단지 우연이었을까?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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