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떤 나라의 풍경 하나. 골목의 구멍가게 주인부터 대기업 사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용주들에게 정부가 보낸 한 통의 문서가 배달됐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적극 동참하라는 취지였다. 그런데 참여 방법이란 게 특이했다. 흰 바탕에 푸른 독수리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엔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한다’(We Do Our Part)는 글귀가 담긴 포스터를 가게와 공장 건물에 내걸라는 것. 이른바 ‘블루이글(blue eagle) 포스터’다. 포스터를 내걸지 않은 가게 또는 공장이나, 포스터를 내걸지 않은 가게 또는 공장의 물건을 구입하는 소비자는 지체 없이 나라의 ‘적’으로 간주됐다. 침체에 빠진 경제를 되살린다는 명분 아래, 도를 넘은 애국 마케팅이 횡행했고 ‘우리 아니면 적’이라는 비이성적 편가르기가 온 나라를 압도했다. 머릿속에 어느 나라를 상상하고 있는가? 비밀을 풀 실마리는 ‘1933년’이라는 인류 역사의 한 토막이다. 1933년, 조국이 사라진 시대. 이 땅의 경성에선 비밀 암살 작전이 펼쳐졌다(고 한다).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 폭탄 전문가 황덕삼이 의로운 행동의 장본인들이다. 다시 1933년, 경제가 무너진 대공황의 시대. 대서양을 사이에 둔 두 거대 산업국가에선 20세기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 정치권력 획득 작전에 나란히 성공했다. 주인공의 이름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아돌프 히틀러.
대공황 폐허에 우뚝 선 정치인 둘묘하게도, 불과 이틀 차이였다. 1933년 3월4일. 이날은 루스벨트가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에 공식 취임한 날이다. 당시 대선에서 루스벨트의 최종 득표율은 57%. 전체 48개 주 가운데 6개 주를 뺀 모든 지역에서 압승을 거둔 일방적 게임이었다. 이틀 뒤, 3월6일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는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이 43.9%의 득표율을 기록해 단숨에 제국의회 최대 의석(288석)을 거머쥐었다. 약 한 달 전 연정 참여를 통해 형식상 총리가 된 히틀러는 이날 선거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확고한 권력 기반을 합법적으로(!) 쟁취했다(스스로 총통이라 칭한 건 이듬해인 1934년 8월의 일이다).
루스벨트와 히틀러. 출신 배경과 경력, 성향만 놓고 본다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유형의 지도자들임이 틀림없다. 한쪽이 유머를 즐기고 낭만적인 귀족 풍모를 뽐냈다면, 다른 한쪽은 하층계급 출신에다 사교성이 떨어지는 외톨박이 스타일이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각기 연합국과 추축국 두 진영의 대표 인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적대국의 수장들이다. 훗날 세상의 대체적인 평가도 크게 엇갈린다. 루스벨트가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을 이겨내고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의 기초를 닦은 지도자, 야만세력에 맞서 ‘문명 세계’를 지켜낸 영웅이라는 평판을 누린 반면, 히틀러에겐 으레 독재자와 파시스트, 인류사 최악의 범죄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전쟁의 승패는 둘의 사후 운명마저 뚜렷하게 갈라놓았다.
그런데 과연 이뿐일까. 루스벨트와 히틀러는 너무도 다른 길을 걸어간, 그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사이였을 뿐일까. 차분하게 짚어볼 만한 구석은 꽤 많다. 루스벨트와 히틀러 모두 산업혁명의 원조인 대영제국의 뒤를 이으려는 미국과 독일의 치열한 후발 산업화 경쟁의 상징이다. 두 사람을 뛰게 한 건 동일한 심장이었다. 무엇보다 둘의 활동 무대는 1920년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한순간에 붕괴된 뒤 찾아온 대혼돈의 시대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두 사람의 머리는 동일한 문제와 씨름했다. 따로 또 같이! 1930년대 사회경제사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통제하라
근거는 적지 않다. 당시나 지금이나 대공황의 원인을 두고선 의견이 여러 갈래로 엇갈린다. 농산물과 원료의 과잉생산, 산업생산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가계 구매력, 재정 시스템의 후진성, 높은 관세장벽 등이 원인으로 두루 꼽힌다. 하지만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당장 세상은 해법을 갈구했다. 중요한 건, 대공황이 왜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였다. 출구는 아직 보이지 않았으되, 당대인들의 눈에 적어도 ‘방향’만은 확실했다. 신뢰를 상실한 시장경제의 자기조정 기제를 대체하고, 고삐 풀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규제하고 통제하라. 말하자면, 시장에 자리를 내줬던 ‘사회의 복원’ ‘국가의 재등장’ 프로젝트라고나 할까.
이 대목에서 시야를 좀더 넓혀본다면, 당시 소비에트 정권 역시 국가 주도 후발 산업화의 틀 안에 집어넣을 수도 있을 게다. 1924년 레닌이 죽은 뒤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1927년 ‘일국사회주의’를 부르짖으며 신경제정책(NEP)을 밀어붙였다. 서구 나라들이 예상보다 빠르게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딛고 호황기에 접어들자, 소비에트 초기에 가졌던 세계혁명의 전망이 갈수록 힘을 잃어가던 때였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이란 일종의 ‘소비에트판 국가사회주의’ 전략으로 이해됨직하다. 어떤 면에서는 뉴딜과 나치즘의 관계뿐 아니라, 이들 서구 사회의 변종과 대척점에 섰던 소비에트 체제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동일한 ‘시대정신’이 강하게 작동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
어쨌거나 루스벨트의 뉴딜과 히틀러의 나치즘은 약속이나 한 듯 처음부터 보폭을 함께했다. 대공황의 씨앗을 뿌린 1920년대의 고삐 풀린 금융시장에 대한 반감을 공유한 두 나라에선 금융 부문보다는 산업 부문의 중요성이 집중 부각됐다. 당연한 이치다. 대표적인 분야로는 전기와 자동차를 꼽을 수 있다. 뉴딜과 나치즘을 각각 상징하는 공공사업이 테네시강 유역 개발(미국)과 아우토반 건설(독일)인 건 우연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선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1933년 당시 이미 세계 산업생산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한 미국이었으나, 정작 전력 서비스의 혜택을 누리던 가구는 전체 가구의 20%에 그쳤다. 영토가 너무 광활하다보니 전력시장을 좌지우지하던 민간의 전력 트러스트들이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전력 인프라 확충에 소극적이었던 탓이다. 독일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자동차의 나라’ 독일에선 1920년대까지 수제 럭셔리 제품 위주로 자동차 산업 판도가 짜여 있었다. 이런 탓에 대부분의 독일 국민들에게 자동차란 그저 ‘남의 떡’일 뿐이었다. 개인주의 전통이 강한 미국에서 자동차는 일찍 대중화했으나 공공 인프라인 전력망 구축은 뒤처졌다고 한다면, 공동체 전통이 강한 독일에선 정반대 현상이 빚어진 셈이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과 아우토반 건설로 두 나라는 핵심 산업 인프라를 확충하는 성과를 분명 거뒀다. 대규모 고용 창출 효과도 톡톡히 누렸다. 하지만 그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동차와 전기는 20세기 초반 신문명의 대표적 상징이다. 무엇보다 자동차와 전기는 생산 측면에 방점이 찍혔던 종래의 산업화 패러다임이 소비 쪽으로 옮겨가는 데 핵심 고리 노릇을 했다. 아마도 두 나라의 정권이 공공사업 프로젝트를 통해 진정으로 노린 효과는 이것 아니었을까. 소비사회의 전망을 통한 순응과 동원. 두 나라의 경험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테네시강 유역은 테네시·앨라배마·조지아·미시시피·노스캐롤라이나 등에 두루 걸쳐 있다. 면적 9만9800㎢의 이 지역은 원래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강수량, 온화한 기후로 인해 축복받은 땅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도금시대 동안 진행된 대자본의 무분별한 삼림 파괴로 인해 미국에서 가장 버림받은 지역의 하나로 전락했다. 약 250만 명에 이르는 이 지역 거주민의 1인당 평균소득은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할 정도였다. 전력 서비스로부터 완전 소외된 건 물론이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로 생겨난 전기를 루스벨트 정부가 왜 “인민의 전기”라 적극 홍보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공산주의란 소비에트 권력에 전기를 더한 것”이라는 레닌의 말처럼, 뉴딜에 전기를 더하면 곧 복지사회·소비사회가 도래한다는 비유도 등장했다).
전기와 자동차, 소비사회의 동력독일의 경험은 더 극적이다. 히틀러가 아우토반 건설에 나선 건 집권 첫해인 1933년의 일이다. 2년 뒤인 1935년 프랑크푸르트∼다름슈타트 구간을 잇는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가 탄생했다. 흥미로운 건 정작 아우토반을 달릴 자동차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 잘 알려졌다시피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인민차’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성인 2명과 자녀 3명 등 5명을 태우고 시속 100km로 달리되 가격은 990라이히스마르크(1930년대 기준으로는 약 400달러에 해당. 당시 독일 노동자의 주당 평균임금은 32라이히스마르크)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당시 민간 자동차 회사들이 이 조건을 맞출 수 없어서 세상에 태어난 게 국가가 출자하는 형태로 1937년 설립된 폴크스바겐(VW)이다. 그럼에도 자동차 생산은 계속 늦어졌다. 폴크스바겐은 1939년 4월20일 히틀러에게 50살 생일 기념으로 ‘타이프(Type)1’이라 불린 시제품을 선사했으나, 전쟁 돌입과 함께 군수물자 생산 체제로 돌입했을 뿐이다. 미국에서 테네시강 유역 개발 이후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인민의 전기’ 혜택에서 소외됐듯이, 히틀러 시대의 대다수 독일 국민에게 ‘인민차’는 미완의 꿈이었을 뿐이다.
그럼 루스벨트와 히틀러의의 성적표는? 뉴딜과 나치즘이 과연 경제적 성과를 거뒀는지에 대해선 의문부호가 따라다닌다. 1929년 820억달러에서 1932년 400억달러로 줄어들었던 미국의 국민소득은 1937년 여름 700억달러 선을 회복했다. 1932년 600만 명이던 실업자도 1936년 100만 명까지 감소했다. 하지만 1937년 이후 경기는 다시 둔화 국면에 빠져들었다. 미국 경제가 대공황의 늪에서 빠져나온 건 전시경제 체제로 이행한 이후의 일이다. 독일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규모 공공투자 사업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독일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은 바이마르공화국 시절보다 더 낮아졌다. 생활비용이 25% 오른 터라 살림살이는 더욱 궁핍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뉴딜과 나치즘은 각자 ‘제 갈 길’을 걸어갔다. 차이점이 공통점을 압도했다. 그 마지막엔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승리한 뉴딜의 신화화와 패배한 나치즘의 악마화라는 대립 구도가 형성된 건 자연스런 과정이다. 영웅과 악마는 애초부터 전혀 다른 존재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봤을 때 뉴딜정책에 긍정적 알맹이가 담겨 있었던 것도, 나치즘이 인종학살이라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1930년대라는 세계경제사의 특정 시기는 둘을 떼어내서는 결코 그 온전한 실체에 다가서기 힘들다. 독립된 개체로서의 뉴딜과 나치즘이 아니라, ‘뉴딜 안의 나치즘’ 또는 ‘나치즘 안의 뉴딜’쯤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미국과 독일이 친족관계이던 시절블루이글 포스터가 전국에 휘날리던 1930년대의 미국은 스바스티카(卍·나치 상징 문양)로 뒤덮인 당대의 독일과 ‘친족관계’였다.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정치)의 우위, 금융부문의 통제와 산업부문의 육성이라는 공통의 과제와 맞닥뜨리고 있어서다. 결과적으로 뉴딜과 나치즘은 경쟁하고 모방하며 동시에 상호 침투하는 완벽한 ‘거울 이미지’ 아니었을까. 그리고 역시나 서로에게 거울 이미지였던 두 사람. 운명처럼, 1945년 같은 달(4월). 3주 새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난 루스벨트와 히틀러.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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