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 주문서] 새 술은 새 부대에. 새해를 맞이해 구매를 고려하는 대표적인 상품이 다이어리다.
[주문 내역]경기 불황으로 다이어리 매장이 붐비고 있다. 교보문고 핫트랙스 관계자는 2014년 12월 중순 기준 다이어리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8% 정도 늘었다고 했다. 그는 “다이어리는 불황일 때 더 많이 팔린다. 아무래도 2015년이 힘들어 보이니까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계획을 짜는 사람이 많은 게 아닐까”라고 설명했다.
연말을 맞은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다이어리 매장은 지나다니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다이어리는 12월 중순부터 다음해 초까지 가장 많이 팔린다. 10만원을 훌쩍 넘기는 외국산 시스템 다이어리부터 2만~3만원대 디자인 다이어리, 1만원 이하의 포켓형 수첩까지 다양한 제품이 있어 선택의 폭도 넓다. 커피전문점에서 내놓은 다이어리도 잘 팔린다. 스타벅스의 경우 커피를 7만~8만원치 마시고 스티커를 17장 모아야 하지만 매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스타벅스는 2014년 역대 최대인 38만 개를 제작했다.
모바일 시대를 맞아 종이 다이어리 대신 디지털 캘린더를 쓰는 사람도 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캘린더나 메모장 같은 애플리케이션(앱)을 이용하는 경우다. 일정 관리, 메모, 알림 등 안 되는 기능이 없다. 게다가 앱은 싸다. 펜이냐, 손가락이냐.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맞붙은 다이어리 시장, 무엇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
욕이라도 적는 감정의 배설구“다이어리를 잘 쓰고 싶으면 뭐든지 적어라.”
다이어리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을 묻자, 두 사람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같았다. 적다보면 정리도 되고, 찾아도 보고, 습관도 된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윤선현 베리굿정리컨설팅 대표는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욕이라도 적으라고 말한다”고 웃었다. “한 학생이 학업 스트레스를 다이어리에 적었다고 한다. ‘18’, ‘개XX’, 뭐 이런 것을 한 달 동안 적으니까 더 이상 적을 욕이 없다고 했다. 그 뒤에 이 학생이 스트레스도 줄고 감성적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 조금 이야기가 과장됐을지 모르지만 윤 대표는 “다이어리가 감정의 배설구가 됐다. 사람들이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고 살지 않는가. 다이어리에 뭐라도 적으면 정리가 되고 표출이 된다”고 했다.
2014년 12월19일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오랫동안 다이어리를 써온 두 사람을 만나 열심히 수첩에 대화를 적었다. 윤선현 대표는 중학교 때부터 수첩을 쓰기 시작해 군에서도 육군훈련소 수첩을 군생활 내내 쓸 정도로 ‘정리의 달인’이다. 최근엔 주로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일정 관리를 한다. 이에 반해 김백빙 데일카네기코리아 실장은 종이 다이어리만 15년째 쓰고 있다. 김백빙 실장은 캘린더 앱에 일정을 기록해도 다시 종이 다이어리에 옮겨적어야 직성이 풀린다.
이들은 직장인에게 괜찮은 다이어리로는 프랭클린 플래너를 꼽았다. 일정관리와 메모 등 필요한 기능이 잘 갖춰졌다는 이유다. 하지만 프랭클린 플래너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게 두 사람의 일치된 의견이다.
윤선현(이하 윤): 사람들이 다이어리를 선택할때 중요하게 보는 것은 사이즈와 디자인, 실용성이다. 브랜드를 따지기도 한다. 기능성이 좋은 것은 프랭클린 플래너, 3P 바인더 등이고 종이 질은 몰스킨 등 외국산 다이어리가 좋다. 잉크가 번지지 않는다. 디자인 업체들도 약간의 기능성을 넣은 다이어리를 내놓고 있다. 소비자는 가격에도 민감하다. 대부분 선물용으로 고르기 때문에 저가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기록을 할 것인가, 관리를 할 것인가김백빙(이하 김): 다이어리를 쓰는 여성을 보면 두 부류다. 무엇을 했는지 족적을 남기는 용도로 쓰는 부류와, 업무나 성과관리 쪽으로 사용하는 부류다. 족적을 남기려는 목적이라면 어느 다이어리를 써도 괜찮지만, 내 경우에는 기능적인 면에 관심이 많아서 3P 다이어리를 쓴다.
윤: 스타벅스 다이어리나 몰스킨 같은 것도 많이 쓴다. 최근에 커피를 마시고 열심히 스티커를 모아서 다이어리를 받았는데 직장인들이 업무용으로도 많이 쓰더라. 회사수첩도 많이 쓴다. 드라마 을 보면 모두 회사수첩을 들고 회의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김: 회사수첩도 요즘엔 고급스럽게 잘 나온다. 잘 만들었다고 칭찬해도 회사원들은 회사에서만 쓴다고 한다.
윤: 디자인 업체에서 만든 다이어리는 잘 추천하지 않는다. 광고나 디자인 등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기자기한 다이어리가 좋을지 몰라도, 일반 기업 직원에게는 일정 등을 기록하는 데 편하지 않다. 그것보다 문제는 사람들이 연초에 사는 다이어리를 1년 동안 들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소비자는 새해를 맞아 다이어리를 사는 행위나 새 수첩을 좋아하는 것 같다.
질문은 본질로 돌아갔다. 다이어리는 적지 않으면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 어떤 브랜드의 상품이건 잘 적으면 유용하지만, 필요가 없다면 브랜드의 차이는 무의미하다.
윤: 다이어리에 뭘 채워야 한다고 하면 어떤 분은 심장이 멎는 거 같다고 말한다. 쓸 게 없다고, 채울 게 없다고 한다. 그러면 명언이나 책 내용을 옮기는 게 시작이다. 친구를 만나면 내가 읽은 내용을 말해줄 수 있을 정도로만 적으면 된다. 계획적인 사고가 필요 없거나 업무적으로 다이어리를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은 그냥 자유롭게 노트에 쓰면 된다.
김: 나도 일단 적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이어리를 ‘시간가계부’ 용도로 사용했다. 앞부분에는 계획한 것을 적고, 뒷부분에는 실행한 것을 적었다. 또 메모를 하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더 창의적이 된다. 남편이 사업계획서를 짤 때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으면 왜 그런가 싶다. (웃음) 종이에 적으면서 하면 더 생각이 잘 날 텐데 말이다.
윤: 사람들과 만날 때 상대방이 수첩이나 다이어리를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내 이야기를 경청할 준비가 돼 있고 정리하고 있구나 생각하면 대화가 더 잘된다. 스마트폰에 메모하면서 상대방과 대화하기는 힘들지 않나. 그래서 종이 다이어리가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김: 확실히 아날로그를 좋아한다. 종이에 쭉쭉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치는 맛이 좋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더라도 출력을 해서 다이어리에 묶어놓는다. 사람들이 ‘무슨 청승이냐’(웃음)고 하는데 이런 게 모이면 책이 된다.
종이 다이어리 훈련 있어야 앱도 잘 써김씨와 같은 이들은 사실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국내의 대표적인 시스템 다이어리의 매출액은 5년 전에 견줘 반토막이 났다고 한다. 뉴스나 쇼핑 등 다른 서비스처럼 스마트폰은 다이어리를 흡수하고 있다. 자신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말라고 재촉하는 스마트폰은 ‘창의적’이라는 메모의 장점을 살릴 수 있을까.
윤: 종이를 쓰다가 디지털로 넘어간 지 4년이 됐다. 스마트폰에 기본으로 있는 캘린더 앱으로 일정을 관리하고, 해야 할 일은 ‘원더리스트’로 체크한다. 메모할 게 생각나면 다이어리 대신 스마트폰 앱 에버노트에 쓴다. 최근엔 노트에 쓰면 스마트폰 앱으로 내용이 그대로 전송되는 펜까지 나왔다. 디지털로 못할 게 없다. 그러나 내가 디지털 다이어리를 유용하게 쓰는 것은 종이 다이어리를 통해 훈련했기 때문이다. 종이 다이어리에 익숙하지 않은데 디지털 다이어리를 잘 쓸 수 있는 사람은 몇%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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