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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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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적인 게 뭐가 문제인가

불세출 경제학자들 극찬하는 한편에서 ‘거품 인기’ 비아냥거리는,
논쟁의 중심에 있는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
‘프랑스혁명’의 산물인 프랑스 인권선언 정신에서 시작된 책, 분배를 경제학의 중심으로 끌고 와
등록 2014-06-10 13:44 수정 2020-05-03 04:27

대논쟁이 시작됐다. 한 젊은 프랑스 경제학자의 반란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조지프 슘페터가 일찍이 말한바, “명백한 것만큼 기만적인 것은 없다”. 피케티의 반란은 명백하다고 생각했던 것과의 불화에서 시작됐다. 예컨대, 오늘날 아무리 불평등하다 하더라도 귀족이 넘쳐나던 19세기에 비하면 훨씬 평등하다는 ‘명백한’ 믿음에 대해 피케티는 물음표를 단다. 그리고 방대한 역사적 통계 작업을 통해 그는 우리가 사실 19세기만큼 불평등한, ‘기만적인’ 21세기에 살고 있음을 폭로한다.

600%를 향해 가는 자본비율

토마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

토마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

그의 책 제목은 (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이다. 19세기 후반에 출간된 카를 마르크스의 을 연상케 하는 제목을 뽑았다. 피케티의 책은 프랑스어로 먼저 출간됐고, 의 원작은 독일어다. 의 차이다. 둘 다 출간되자마자 영어로 번역됐다. 마르크스의 이 “모든 부의 기초는 상품”이라는 언명에서 시작해 결국 소수의 손에 모든 부가 집중되는 파국론으로 끝났다고 하면(적어도 피케티는 을 그렇게 읽는다), 피케티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한다. “과연 마르크스가 19세기에 믿었던 것처럼 자본 축적의 동학은 몇몇 소수에게로의 부의 집중, 이것으로 필연적으로 귀결하는 건가?” 그의 책 세 번째 문장에 나오는 질문이다. 무려 600쪽에 달하는 책을 읽어내는 인내가 필요하지만, 그가 들려주는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우선,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부의 집중을 심화하는 경향이 있다. 소득분배의 핵심 중 하나는 자본과 노동 간의 분배다. 자본이 가져가는 몫을 편의상 자본몫이라 하자. 자본몫은 크게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첫째는 자본의 전체 크기이고, 둘째는 단위당 자본에 돌아가는 수익률이다. 이론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다. 이 대목에서 피케티의 역사적 통계가 힘을 발휘한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19세기 이래 자본수익률은 4~5% 수준으로 안정적이었다. 따라서 불평등 확대에 관한 한, 자본수익률은 ‘무죄’다. 그렇다면 문제는 자본의 크기다. 그가 주목하는 지표는 국민소득 대비 자본의 크기인데, 역시 편의상 자본비율이라고 하자. 유럽의 경우 자본비율이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600%를 넘었다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200%대로 급감했다. 하지만 이후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가 1980년대부터 비약적으로 급증했다. 그 결과 자본비율은 현재 500%를 넘어서서 600% 고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자본비율이 이렇게 늘어나니 자본이 가져가는 소득몫도 자연히 증가하고 있다. 21세기가 19세기를 만나러 가는 형국이다.
하지만 피케티는 마르크스식 파국론은 거부한다. 그 이유 또한 간단하다. 인간들이 제도와 정책을 통해 불평등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의 배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불평등 감소가 사회적 공감대를 기초로 한 사회·정치적 노력에 기인했다는 역사적 판단도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피케티는 분배 불평등에 대한 정책 무용론을 설파하는 주류 경제학적 논의와도 간단히 결별한다. 동시에 그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불평등 심화 경향이라는 비관에, 저항하고 행동하는 인간의지라는 낙관을 버무렸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경제학자의 솜씨는 아니다.

지나치게 단순한 해법, 국제자산세

프랑스 파리경제대학의 토마 피케티 교수. http://commons.wikimedia.org/ Sue Gardner

프랑스 파리경제대학의 토마 피케티 교수. http://commons.wikimedia.org/ Sue Gardner

그럼, 인간의 낙관적 의지로 무엇을 해야 하나? 여기서 그의 제안은 너무 논리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소득 불평등의 근원이 자본비율 증가에 있으니 근원적 해법은 이를 막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 또는 자산의 무차별적 증식을 막으려면 여기에 과세를 하면 된다. 이른바 자산세(Wealth Tax)다. 그런데 자본 이동이 자유롭고 각국이 세금 삭감으로 자본을 유인하려고 경쟁하는 마당에 일국적인 해법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전세계적으로 적용되는 자산세, ‘국제자산세’(Global Wealth Tax)가 곧 그의 해법이다. 마르크스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세계동시혁명론’이다.
피케티의 책은 이렇듯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그의 책을 온몸으로 반기는 이들은 이미 불평등 문제로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용장들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나섰다. 피케티 책에 딱 한 번 언급된 폴 크루그먼은 경제학이 앞으로 피케티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것이라고 극찬했고, 피케티가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로버트 소로도 거들고 나섰다. 또 다른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그의 책 각주에서나 언급되는 수모를 당했지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의 극찬은 판매 돌풍을 일으켰다. 물론 이들은 대부분 비판적 지지론자다. 자산세가 정책 해법인지에 대한 의문도 있고, 이를 수용하는 쪽에서도 세계혁명론에는 회의적인 편이다. 그의 분석에는 찬성하지만 그의 정책 대안에는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평소 피케티식 주장에 우호적이지 않은 이들은 이 예상외의 돌풍을 일으키자 조금 당황했다. 삼류소설 작가의 눈물 짜내는 소설 정도로 치부하는 비아냥거림이 나왔다. 영국 경제지 는 피케티의 인기를 거품에 비유하면서, 피케티를 알고 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이른바 ‘피케티 거품’이 형성되는 9단계를 제시했다. 이 책을 쓴 자가 결국은 “알아먹지 못할 유럽 사투리”(프랑스어를 지칭)를 구사하는 프랑스 경제학자이니, 그의 요사한 언술에서 생긴 말은 모두 거품일 뿐이라는 야유다. 같은 신문의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가 장문의 서평을 통해 담담하게 피케티의 성취에 대해 격찬한 것과도 묘한 대조를 이뤘다.
의 다소 유치한 비판 방식은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곧이어 통계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비판 공세를 이어갔다. 지난 5월23일치에서 경제부문 편집장은 피케티의 통계에 결정적 하자가 있고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조작에 가까운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경제학자 카르멘 라인하르트와 케네스 로고프가 엑셀 파일을 잘못 다루는 바람에 공공부채가 국민소득의 90%를 넘으면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준다는 주장의 신빙성을 의심받았던 사건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피케티도 그 운명을 곧 맞이할 것이라는 예상도 덧붙였다. 사실, 피케티의 장기 통계는 여러 가지 역사적 자료를 다듬어 나온 것이기 때문에, 허점이 없을 수 없고 추계 방식에 대한 논쟁을 피할 수 없다. 피케티도 이런 사정을 잘 아는지라 모든 통계 자료를 공개해둔 터였다. 그런 면에서 가 통계의 신뢰성을 거론한 것은 논쟁의 고리를 제대로 잡은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 오류를 발견한 것으로 피케티의 분석을 통째로 비판하려 한 점은 패착이다. 영국 주간지 를 비롯해 언론과 학계는 대체적으로 의 비판이 지나치다는 견해다. 5월28일 피케티는 10쪽에 달하는 장문의 답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의 역사상 드문 ‘대형 참사’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피케티의 책이 의 많은 독자들을 그만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증거다.

주류가 없는 프랑스

2011년 미국 월가에서 펼쳐진 ‘점거하라’ 시위 현장. 그린비/한겨레신문

2011년 미국 월가에서 펼쳐진 ‘점거하라’ 시위 현장. 그린비/한겨레신문

이론적인 문제도 있다. 피케티는 자본비율 증가의 이유를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을 상회하는 장기 역사적 경향에서 찾았다. 이것이 언론에도 등장해 일반 독자를 괴롭히는 ‘r>g’라는 공식인데, 그는 여기에 ‘자본주의 제2법칙’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다. 그의 책에서 정리된 통계에서는 분명해 보이긴 하지만 이론적으로 두고두고 논란이 될 조짐이 보인다. 그가 비판한 수많은 거시경제학자들이 여기서 피케티의 아킬레스건을 발견할 공산이 크다.
좌파 진영 쪽도 피케티의 책에 무조건 우호적이진 않다. 일부는 그의 책이 소득분배에 대한 논쟁을 열어젖혔다는 사실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거친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피케티는 자본을 현물 자산 덩어리로만 보기 때문에 자본에 내재한 사회·정치적 관계를 무시한다는 유의 근본적인 비판이 적지 않다. 피케티의 정책 대안인 국제자산세는 유토피아적이지 못해 순진하기까지 하다는 논평도 나온다. 심지어 제목은 마치 을 연상시키면서도 정작 이 책이 이룬 성과는 없다는 혹평도 있다. 그를 꿈만 야무지고 패기만 넘치는 철부지로 보는 경향마저 있다.
이런 다양하고 날선 비판은 역설적으로 피케티의 문제작이 이룬 대업적이다. 이젠 소득분배와 자산 불평등을 논하지 않고서는, 따라서 피케티를 거론하지 않고서는, 경제정책을 논하기란 어렵게 되었다. 분배 문제가 당장 경제학과 경제정책의 중심에 서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변방의 서러움에서는 벗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그의 책을 두고 논쟁이 깊어지고 치열해질수록, 그의 책이 낱낱이 분해되고 조립될수록, 피케티 책의 지위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그는 미국 학계의 주목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그곳 경제학에 실망해 프랑스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홀로 주류 거시경제학의 해체 작업에 몰두했다. 이론적·수학적 정합성에서 탈출해 역사적 접근을 택했다. 역사가 거세된 경제학에 역사를 도입해 대반란을 꿈꿔왔다. 슘페터는 “천재와 예언자들은 보통 체계화된 전문 학습과정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며, 그의 독창성은 대개 그런 것들에서 뛰어나지 않았다는, 바로 그런 점에 기인한다”고 했다. 피케티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는 동시에 프랑스의 아들이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대저작 이 프랑스어판으로 번역 출간됐을 때, 케인스는 서문에 다소 변명조에 가까운 설명을 붙였다. 은 당시 영국와 미국에 지배적인 주류 견해에 대한 비판인데, 프랑스에는 사람들의 생각을 획일적으로 지배하는 ‘주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책의 맥락을 이해하기 힘들 거라고 했다. 더 나아가 케인스는, 시장경제의 조화를 믿는 프랑스 경제학자 장바티스트 세에서 벗어나 을 쓴 샤를 몽테스키외로 돌아가자는 게 자신의 생각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바람에, 그 뜻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후대의 학자들을 내내 괴롭히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주류가 없는 프랑스에서 피케티는 자유로웠다.
그의 책은 역설적이다. 소득 불평등에 관한 글인데, 왜 불평등이 문제인지를 차분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친절한 그가 이 점에서는 야박할 정도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끔찍한 상황을 상상해보라는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평등이 경제적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 포스트 케인지언적 시각은 완전히 누락돼 있다. 실상 피케티는 이 문제를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의 책은 프랑스 인권선언 제1조를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 살며 동등한 권리를 누린다”로 잘 알려진 조항이다. 그런데 제1조에는 이 문장 뒤에 따라오는 문장이 하나 더 있다.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공의 선(l’utilite commune)에 기초할 때만 있을 수 있다.” 피케티는 바로 이 문장을 인용한다. 이게 그의 화두다. 그리고 오늘날 소득분배에서 발견되는 격차 내지 ‘사회적 차별’이 과연 공공선이라는 차원에서 용인될 만한 수준인지를 묻는다. 불평등이 사회가 용인할 수준을 넘었다면 사회는 응당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회는 위기라는 쓴약을 마실 수밖에 없다. 프랑스의 인권선언은 프랑스혁명의 산물이다.

차별이 공공선 차원에서 용인될 수준인가

피케티 자신도 국제자산세가 유토피아적이라는 점은 공공연하게 인정한다. 개의치 않는 눈치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듯하다. 주판알 굴리듯이 꼼꼼하게 챙긴 역사적 통계라는 든든한 보배가 있기 때문일 것이고, 아마 19세기 말의 유토피아적 사고가 20세기 들어 불평등을 줄인 대개혁의 산파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경험을 똑똑한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역사가 보여주듯이, 이런 유의 책은 늘 손쉬운 적이고 동네북이다. 시끄러울 운명이다. 피케티 논쟁은 이제 시작됐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연구조정관

*국제기구에서 활약하는 이코노미스트이자 역사·철학·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글솜씨를 갖춘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연구조정관이 3주마다 독자에게 경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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