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정신과 의사이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저자로 유명한 올리버 색스 박사 타계 3주기를 계기로 ‘올리버 색스-추모의 밤’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저서를 국내에서 활발하게 낸 출판사와 함께였습니다. 색스 박사와는 사용하는 언어도 태어나 살아온 나라도 겹치는 것이 없지만, 오직 그의 글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한자리에 모인 이들이 저마다 그의 저작 중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나누는 시간이었죠.
어스름한 여름밤, 서울 삼청동 골목길의 작은 책방에서 이루어진 추모의 밤 행사 분위기는 더없이 좋았습니다. 한 가지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말이죠. 그 사소한 문제란 당일 주최 쪽에서 나눠준 리플릿에 인쇄된 글을 다 함께 낭독하는 부분에서 시작됐습니다. 리플릿은 한눈에 보아도 정성을 들인 태가 났습니다. 디자인은 단정했고 종이 질감이나 색감도 신경 써서 고른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문제는 정갈한 느낌을 주기 위해 은은한 색으로 쓰인 작은 글씨에 있었습니다. 추모의 밤이라는 행사에 걸맞게 조명 밝기를 최대한 낮추고 간접조명만을 켜놓은 터라 행사장 안은 어둑한 편이었고, 참가자들의 평균연령은-확인해본 건 아니지만- 줄잡아 40대 이상이었습니다. 어두운 조명과 연한색의 작은 글씨, 그리고 중년의 나이라는 세 요소가 더해지자 세상 침침한 노안(老眼)의 실체가 드러나버린 것입니다. 당황했습니다. 그저 인쇄된 문자를 읽기만 하면 되는, 갓 글을 뗀 어린아이조차 할 수 있는 일을 마흔도 훌쩍 넘긴 나이에 제대로 할 수 없다니 말이죠. 리플릿을 읽지 못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눈 밝은 젊은 편집자를 보며, 저를 포함한 노안 소유자들은 그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카메라는 렌즈를 통과한 빛이 굴절돼 내부 공간을 지나 필름 위에 상을 맺습니다. 이때 피사체와의 거리에 따라 렌즈를 앞뒤로 움직여 초점이 정확히 필름 위에 맺히게 해 선명한 사진을 찍지요. 인간의 눈도 비슷하게 움직입니다. 각막과 수정체를 통과하며 굴절된 빛은 안구 내부 공간을 지나 망막의 중심 오목에 상을 맺습니다. 이때도 역시나 피사체의 거리에 따라 초점이 맺히는 거리가 달라지지만, 안구 크기나 각막 위치는 고정돼 있기 때문에 굴절률의 조절을 담당하는 것은 수정체입니다.
수정체는 수정처럼 투명한 조직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지만, 단단한 수정과는 달리 탄력이 있어 약간의 모양 변형이 가능합니다. 수정체가 두꺼워지면 유입되는 빛의 굴절 각도가 더 커지고, 얇아지면 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 눈은 수정체를 잡아주는 근육인 모양체를 이용해 초점을 맞춥니다. 가까운 곳을 볼 때는 모양체가 수축하고 수정체가 통통해지며, 먼 곳을 볼 때는 모양체가 느슨하게 이완되고 수정체도 납작해지면서 빛의 굴절 각도를 조절해 또렷한 시야를 확보합니다.
이런 상태를 정시라고 하는데, 여러 이유로 수정체가 상대적으로 두꺼운 상태로 유지돼 먼 곳이 흐릿하게 보이면 근시, 수정체가 상대적으로 납작해 가까운 곳이 또렷이 보이지 않으면 원시라고 합니다. 대개의 신생아는 원시 상태로 태어납니다. 근육이든 정신줄이든 어느 정도 느슨하게 풀어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팽팽하게 바짝 당기고 긴장하는 것보다는 더 수월하기 때문이죠. 그러니 부모가 아이를 안고 얼러주면서 자주 눈을 맞추는 것은 아이의 시력 발달에 매우 중요합니다. 아기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무언가를 보기 위해 집중하면서 점차 눈을 조절하고 초점을 맞추는 방법을 익히기 때문이죠. 그렇게 애써서 부모와 눈을 맞추는 데 성공한 아기의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방긋한 미소는 부모에게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고요.
13년 동안 갇혀 근시가 된 소녀 ‘지니’자라면서 아이의 눈은 조절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먼 곳을 볼 때, 가까운 곳을 볼 때, 색을 볼 때, 문자를 인식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눈을 사용하는 방법을 경험으로 체득하죠. 이 시기에 본 것은 향후 눈 발달에 큰 영향을 줍니다. 심각한 아동 방임의 결과로 언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를 놓쳐 평생 말을 배울 수 없었던 소녀 ‘지니’는, 눈에 이상이 없었음에도 3m 이상 떨어진 물체는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태어나서 13년 동안 갇혀 살았던 방의 전체 길이가 3m 정도였기에 지니의 눈은 그 이상의 거리를 인식할 능력을 잃어버렸죠.
최근 들어 근시인 아이가 늘어나는 것은, 실내에서 머무르는 절대적 시간이 예전보다 크게 늘어난 것도 한몫합니다. 이 시기를 무사히 넘겨 조절이 잘되는 눈을 가지면 이후 삶은 다소 편해집니다. 인간은 시각을 통해 가장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시력에 문제없다는 것은 세상을 좀더 수월하게 받아들이는 좋은 전제가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나이가 들면 다시 문제가 일어납니다. 여러 번 잡아당긴 고무줄은 탄성을 잃고 오래 사용한 경첩은 헐거워집니다. 인간의 신체조직은 어느 정도 회복력이 있어 손상되면 끊임없이 재생되고 대치되지만, 노화는 이 턴오버의 활성과 주기를 늦추는 역할을 합니다. 나이 들수록 수정체는 탄성을 잃고 납작해지며, 모양체는 수축력이 약해져 수정체를 당기는 정도가 떨어집니다. 이는 가까운 것을 보는 기능에 영향을 미쳐 특징적인 ‘할아버지의 신문 읽기 자세’를 나도 모르게 따라 하게 됩니다. 고개는 뒤로 빼고 팔은 앞으로 쭉 뻗어 거리를 떨어뜨려야 신문이나 책의 글씨를 제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시가 노안 증상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게 전부라면 돋보기 기능이 있는 볼록렌즈 안경의 도움만으로도 쉽게 해결이 가능합니다. 노안이 불편한 두 번째 이유는 나이 들수록 세상이 어둡고 침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수정체에 있습니다. 원래 수정체는 맑은 물처럼 투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빛이 가장 잘 통과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빛은 그 자체로 에너지를 가진 파동이고 에너지를 가진 존재와 끊임없이 마주한다는 것은 그만큼 손상 가능성에 노출된다는 뜻입니다. 빛은, 특히나 에너지가 강한 빛인 자외선은 수정체 조직에 영향을 줘 투명한 수정체를 흐릿하게 변성시킵니다.
백내장이 일어나는 것이죠. 수정체를 구성하는 단백질이 손상돼 백탁 현상이 일어나면 내부로 들어가는 빛의 양이 줄어들기 때문에 시야가 어두워집니다. 나이가 들면 먹은 밥그릇 수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빛에 대한 노출량도 늘어날 테니 수정체 백탁 현상이 더 늘어날 겁니다. 노화는 백내장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며 여기에 지나친 자외선 노출, 흡연, 당뇨, 눈의 염증, 수정체를 손상할 수 있는 각종 약물은 부스터 요인이 되지요.
수정체 변화뿐 아니라 안구 내부의 변화도 침침함의 원인이 됩니다. 노화로 신체조직의 활성이 떨어지면 혈류 흐름도 약해지고 그때그때 치워줘야 할 노폐물이 원활히 제거되지 못해 망막 근처에 쌓이게 됩니다. 이를 드루젠이라 하는데, 드루젠이 늘어난다는 것은 깨끗하고 텅 비어 있어야 하는 빛의 길에 장애물이 생기는 것이니 그늘이 질 테고 그만큼 시야는 침침해지기 마련이죠. 안과 검진 결과 드루젠이 관찰되면 의사들은 망막 검사를 권합니다. 드루젠이 제대로 치워지지 못한 노폐물 잔해로만 이루어졌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망막 염증 혹은 손상의 결과로 발생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드루젠은 미처 치우지 못한 찌꺼기가 아니라 더 큰 손상의 잔해일 수 있기에 추가 조치가 필요하게 되니까요.
예전에는 노안 하면 나이 든 겉모습이든 확연히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야 비로소 나타나는 현상으로 여겼습니다. 특히나 학창 시절에는 시력검사표의 가장 아랫줄에 쓰인 글씨도 무리 없이 읽어냈고, 대학원 시절에는 몇 시간이고 현미경을 들여다보아도 눈 주변에 접안렌즈 자국만이 신경 쓰일 뿐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해 안타까운 적은 없었을 정도로 시력이 좋았기에, 노안은 나와는 상관없는, 한참이나 먼 이야기처럼 여겼지요. 하지만 노안은 제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습니다. 마흔을 넘기자 책과 눈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더니,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눈앞이 흐릿하게 보이는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바른 자세가, 무릎에 앉힌 아이에게 책을 들리고 부모는 뒤에서 바라보는 것이었던 이유를 몸으로 깨닫게 됐죠. 그래야 아이도 부모도 모두 책이 잘 보이니 말입니다.
인생은 공평하다?아이를 셋 낳았더니 몸이 속부터 늙어가는 건가 서글퍼 안과를 찾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농담처럼 그래서 인생이 공평한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눈이 좋았던 사람일수록 노안이 빨리 온다는 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고요. 대개 젊은 시절에 안경을 쓰는 이유는 근시 때문입니다. 노안은 일종의 원시라, 근시였던 이들은 노안이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변화를 덜 불편하게 받아들이지만, 정시였던 사람은 워낙 세상이 또렷하게 보인 시간이 길었던지라 노안의 시작을 민감하게 인지하고 불편함을 더 크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한동안 이유 없는 방황을 좀 했지만 이제는 노안을 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책을 읽거나 컴퓨터 작업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돋보기를 꺼내 씁니다. 근시로 인한 안경이 흠이 아니라면 노안으로 인한 돋보기 착용이 서글플 이유도 없겠지요. 그동안 수고한 눈에 감사하고, 조금 도와줄 테니 앞으로도 오랫동안 함께하자고 다독이면서 눈을 좀더 아껴준다면 노안도 그리 버겁지 않을 테니까요.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늙음의 과학: 나이 들어가는 당신은 노후화되어가고 있나요. 노쇠되어가고 있나요.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의 나이 드는 것의 과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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