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준비하다가 다진 마늘을 찾으려 냉장고 문을 열려는데 아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화장실에 휴지가 없다는군요. 급히 휴지를 찾아 문틈 사이로 건네주고 주방으로 돌아와 냉장고를 열려다 순간 멈칫했습니다. ‘내가 뭘 꺼내려 했지?’
한때는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나름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나이가 들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뭔가 신경이 분산되는 일이 많아지면서, 뭔가를 깜빡깜빡하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냉장고 앞에서 얼어버리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이야기하려는 단어가 혀끝에서 맴돌기만 하고 언뜻 생각나지 않거나, 집 안에서 휴대폰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됐지요. 그런데 저만 그런 게 아닌가 봅니다. 경험을 하소연했더니 친구들도 저마다 자신의 경우를 털어놓습니다. 점점 고유명사가 사라지고 대명사만으로 점철되는 대화, 가족의 전화번호나 집 주소 등 기본적인 정보를 적어야 하는데 떠오르지 않아 당황했던 순간, 약속이나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거나 착각해 낭패를 본 경험들 말이죠. 처음에 웃으며 시작한 이야기가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향수와 씁쓸함으로 마무리됩니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젊은 학자 워너 샤이는 ‘성인의 인지심리학적 발달’을 박사 학위 주제로 삼습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의 뇌는 유아기와 아동기, 청소년기를 거쳐 점차 발달하다가 25살께 정점에 오르고, 이후에는 그 기능이 퇴화한다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육은 이 시기에 집중됐지요. 흔히 아직 어려서 뇌가 ‘말랑말랑할’ 때 배워야 수월하게 익힐 수 있지, 나이 들어 뇌가 ‘굳어버리면’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훨씬 더 어려워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궁금했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 뇌는 정말로 ‘굳어버리는’ 걸까요? 이는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시애틀 종단 연구’(Seattle Longitudinal Study·SLS, sls.psychiatry.uw.edu)의 시초가 됩니다. 이 연구는 1956년을 기점으로 7년을 주기로 2005년까지 총 7번에 걸쳐 시도됐으며, 초기 대상자들이 반복적으로 참여했기에 ‘종단 연구’라 불립니다. (특정 집단을 시간을 두고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나타나는 변화를 관찰하는 것을 종단 연구, 같은 시대를 사는 여러 세대의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는 것은 횡단 연구라 합니다.)
50여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샤이 박사와 연구진은 약 6천 명의 20~90대 성인을 대상으로 인지능력을 검사했습니다. 이때 인지능력을 검사하기 위해 사용한 항목은 어휘력, 단어기억력, 계산력, 공간정향력, 지각-반응속도, 귀납추리력 등 총 여섯 항목이었습니다. 어휘력은 얼마나 많은 단어를 이해하며, 그것과 비슷한 동의어를 얼마나 많이 아는지를 통해 살폈고, 단어기억력은 얼마나 많은 단어를 기억하는지를, 계산력은 사칙연산을 얼마나 빠른 속도로 할 수 있는지로 측정했습니다. 공간정향력은 어떤 도형이나 사물을 회전시키거나 뒤집었을 때 모습을 보고 원래 모습을 알아맞힐 수 있는지, 지각-반응속도는 특정 신호가 나타났을 때 얼마나 빨리 버튼을 누를 수 있는지, 귀납추리력은 주어진 정보와 자료에서 얼마나 논리적으로 결과를 추론할 수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사람의 일생에서 개인의 인지능력은 언제 가장 정점에 오르며, 그 기능이 감퇴하는 건 언제부터일까요?
‘시애틀 종단 연구에서 연령별 인지능력 결과’ 그래프를 볼까요. 기존 예측대로 25살에 정점에 이르렀다가 나이가 들수록 가파르게 떨어지는 인지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반응 속도와 계산력입니다. 주어진 정보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능력과 숫자를 계산하는 능력은 역시나 젊었을 때 가장 뛰어났습니다. 요즘 들어 간단한 계산이 이전만큼 잘되지 않았던 건 이 때문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서 흥미로운 점은 나머지 네 가지 능력이었습니다. 즉 어휘력, 공간정향력, 단어기억력, 귀납추리력은 50대까지도 완만하게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종단 연구 결과, 이 네 항목에 대해서는 참가자 대부분이 20대의 수치보다 45~60살, 즉 흔히 ‘중년’이 됐을 때 더 높은 점수를 기록했습니다. 청년기 이후 중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지능력은 계속해서 발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조사였지요.
이 연구팀의 결과가 발표되면서, 성인기 이후의 인지 발달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이때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즉각적인 반응과 처리 속도나 주의집중력, 계산 능력은 20대 청년기에 최고에 이르렀다가 점차 떨어지지만, 판단력, 요점 파악과 종합 능력, 통찰력, 어휘력 등은 20대 이후에도 꾸준히 발전하며 50대에 절정기에 이른다고 합니다. 즉 단순한 반응, 삶을 관조하는 지혜나 인생을 관통하는 직관력은 중년 이후에 최고점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저 머릿속 기억 저장고에 넣어두기만 했던 단편 정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느 순간 갑자기 연결되며 일종의 인사이트(통찰력)를 얻는 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옛 시절 현인들이 오랫동안 면벽 수행을 하며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 바로 세월의 무게가 더해진 결과가 아니겠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어떤 지식은 특정한 나이가 돼야만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 있더군요. 시애틀 종단 연구의 현재 책임자인 셰리 윌리스 박사는 ‘중년의 뇌’는 퇴화 중이 아니라 활발하게 기능하며, 여전히 우리는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시애틀 종단 연구가 생각보다 뇌의 인지적 기능 유지와 발달이 오랫동안 이뤄진다는 것을 알려줬으나, 그래도 60살이 넘어가면 나이에 따라 분명한 인지적 쇠퇴를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 하락폭의 기울기도 상당히 가파른 편입니다. 즉 생각보다는 늦게 시작되지만 그래도 평균수명이 90살에 육박하고(2022년 기준 한국 여성의 평균수명은 86.6살입니다) 머잖아 100살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측하기에, 60살부터 인지 저하가 시작된다면 약 30~40년간 치명적인 퇴화를 겪게 될 테니 이 역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도 희망을 보여주는 연구가 있습니다. 미국의 노화학자 엘리자베스 젤린스키 박사(‘Sixteen-year longitudinal and time lag changes in memory and cognition in older adults’, E. Zelinski & K. Burnight, Vol.12 No.3, 1997)는 1978년부터 1994년까지 16년간 종단 연구를 해 앞서 시애틀 종단 연구팀이 관측한 것처럼 어떤 인지적 능력은 중년기(여기서는 39~55살)에도 꾸준히 나아짐을 알아냈습니다. 여기에다 젤린스키 연구팀은 인지발달 그래프가 평균수명 증가와 함께 길게 늘어났다는 것도 찾아냈습니다. 1994년 실시된 마지막 결과에서 70살 그룹의 사람들이 받은 인지 검사 점수를 16년 전과 비교해보자 그 차이가 뚜렷이 나타났습니다. 1994년의 70살 그룹은 1978년의 70살 그룹에 비해 인지 검사 점수가 높아서, 당시 55살 그룹의 검사 점수와 거의 비슷했죠. 지금 현재 우리는 과거 사람들보다 뇌가 좀더 천천히 늙어가는 경향을 보이는 셈입니다.
통계적 결과만을 보면, 우리 뇌는 성인이 지난 뒤 한참 동안도 계속해서 발달할 수 있으며, 뇌의 노화속도도 과거보다 느려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경우로 들어가보면, 편차가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노년기까지도 활발한 인지발달을 보여주지만, 다른 이들은 노년기는커녕 중년만 돼도 인지능력이 저하하는 것이 확실히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 어떤 원인이 이런 차이를 가져올까요? <체육관으로 간 뇌과학자>의 저자 웬디 스즈키는 운동이 뇌가소성을 증가시켜 인지적 기능을 개선하고 유지할 수 있음을 스스로 실험을 통해 증명했습니다. 통계적 연구 결과에서도 신체적 건강 상태가 좋은 사람일수록 인지 능력의 감소가 덜 나타났다는 결과가 나왔고요. 운동하면 혈액 순환이 활발해지면서 뇌로 가는 혈류량이 늘어나는데, 이것이 뇌가 기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인지 능력을 담당하는 뇌 역시도 신체의 일부이므로, 건강한 사람의 뇌가 더 건강하다는 것이죠.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였습니다. 갈수록 영양 상태가 개선되고 보건위생과 의학 수준이 높아지며, 건강 상태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람도 많아지니 그만큼 자연스럽게 뇌가 느리게 나이 드는 사람도 늘었죠.
몸을 운동하는 것에 더해 뇌도 운동시켜 준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됩니다. 알츠하이머 등 퇴행성 뇌질환을 연구하는 그룹들은 입을 모아 독서, 바둑, 글쓰기, 암산 등의 지적 활동이 인지 기능 유지에 매우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어느 정도 퇴행성 뇌질환이 진행됐어도 평소 꾸준히 지적 활동을 해왔던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가볍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여러 변수는 물론 존재하지만, 신체적 건강 유지와 꾸준한 지적 활동이 뇌의 생리적·인지적 건강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편한 신발로 갈아 신고 빠른 발걸음으로 산책하고, 지금 먹고사는 데는 크게 상관없는 철학, 역사, 과학책을 펼쳐 읽어보세요. 일과를 마치고 일기를 쓰거나 새로운 운동을 배워보는 것도 좋지요. 하루에 딱 30분, 그 변화가 당신의 뇌를 더 천천히 나이 들도록 할 수 있답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늙음의 과학: 나이 들어가는 당신은 노화하고 있나요, 노쇠해지고 있나요.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의 나이 드는 것의 과학 이야기. 3주마다 연재.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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