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의 삶을 짓밟고 목숨을 빼앗았던 폭군이 인과응보를 받아 목숨을 잃습니다. 사신(死神)조차 때려눕힐 것만 같이 건장한 육체의 소유자도, 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고 태어난 듯 운이 좋은 사람도, 지구상 모든 땅을 소유할 만큼 부를 축적한 사람도 결코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심지어 죽음은 지금 막 세상에 첫 숨을 뗀 갓난아이라 할지라도 동정심을 갖거나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모든 것이 불공평한 이 세상에 적어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서, 그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모두에게 동일하진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더 오래 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노숙인의 평균수명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서도 40대 후반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소득수준 격차는 삶의 길이에 분명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건강형평성학회가 발표한 ‘전국 17개 광역시·도별 건강수명 및 가구소득 상위 20%와 하위 20% 간 건강수명 격차’는 이를 수치로 잘 드러냅니다. 현대사회에서 수명에 대한 형평성을 나타내는 연구들은 대개 그 기준을 소득에 두었습니다. 현대사회는 뚜렷한 신분제 사회가 아니기에 사회계층을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소득수준은 객관적 지표로 비교적 파악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국 모든 지역에서 예외 없이 상위 20%는 하위 20%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지역·남녀별로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상위 그룹은 하위 그룹보다 최소 3년에서 최대 9년까지 더 오래 살았고, 건강수명(기대수명에서 질병이나 사고로 원활히 활동하지 못하는 기간을 뺀 수명) 역시 8년에서 최대 14.8년까지 차이가 났습니다. 소득이 높은 이는 그렇지 못한 이보다 더 오래 살면서도 더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지역별로 보면 소득수준이 높은 것으로 잘 알려진 서울 서초구 주민들의 평균수명이 가장 길었고, 전반적으로 소득수준이 높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주민들 사이의 격차가 가장 작게 나타났습니다. 반대로 가장 평균수명이 짧고, 소득그룹 간 수명·건강 불평등이 높은 곳은 주민들의 평균소득 역시 낮았습니다. 이는 언뜻 당연해 보입니다. 소득이 낮은 이들일수록 몸을 혹사하거나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과 식단에 투자하기보다는 하루하루 살아내는 일에 더 급급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현상은 자연계에서도 나타납니다. 개미나 꿀벌 같은 사회성 곤충의 경우 여왕은 일꾼 무리보다 훨씬 오래 삽니다. 일벌은 번데기에서 깨어난 뒤 평균 4~6주밖에 살지 못하지만, 여왕벌은 이보다 훨씬 긴 2~5년까지도 생존합니다. 개미 역시 마찬가지여서 여왕개미는 일개미보다 최소 10배 이상 오래 살지요.
무리 지어 살고 우두머리 암컷의 지도하에 계급사회를 이루는 점박이 하이에나의 경우, 계층은 특히 어린 개체의 수명에 절대적 영향을 줍니다. 우두머리 암컷에게서 태어나 어미의 지지와 보호를 받는 새끼는 그렇지 못한 새끼보다 평균 3천 일 이상 오래 삽니다. 자연에서 점박이 하이에나의 평균수명이 12년 내외인 것을 고려한다면, 어떤 계층에서 태어나 얼마나 많은 사회적 지지를 받았느냐는 것은 이들에게 단순히 좀더 오래 사는 정도가 아니라,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절대적 요소로 작용합니다.
세상이 불공평한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숫자로 놓고 보니 더욱 맥이 풀립니다. 게다가 이 효과는 삶에서 꽤 이른 시기부터 미래에 영향을 미칩니다. <보건사회연구>에 실린 ‘생애과정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노년기 건강’ 연구에 따르면, 아동기 초기의 경제적 빈곤은 그 아이가 자라 노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신체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제대로 지원받지 못한 아이는 교육수준이 낮아질 가능성이 크고, 이는 다시 중년기의 소득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며, 이로 인해 노년기 건강에도 불리한 영향을 주는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의 그림자가 수십 년을 따라다니며 그늘을 드리운다는 건,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자조 섞인 ‘수저론’이 객관적 연구 지표로 뒷받침되는 듯해 씁쓸합니다.
이런 현상은 의학이 발달할수록 더 심화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브 헤롤드는 저서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꿈꿀자유 펴냄)에서 미래의 보편적 시민 ‘빅터’의 평범한 삶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빅터가 사는 세상은 의학이 고도로 발달해 인간의 신체 기능을 대체할 방법이 너무나도 다양한 세상입니다. 2형 당뇨병은 인공췌장을 이식받아 완치하고, 사고로 잃은 팔은 원래의 것과 동일한 스마트 의수로 대치한 빅터는 말기 심부전이 오자 고장난 심장을 인공심장으로 대치하며, 백 살이 넘어도 갓 마흔을 넘긴 사람처럼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이식된 인공장기들은 완벽하게 기능하지만, 빅터가 언제까지 그런 상태로 살아갈지는 그가 인공장기를 얼마나 더 감당할 수 있는가에 달렸을 것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인공장기라 해도 언젠가는 내구연한이 다 돼 교체할 필요가 생길 테고, 언젠가 빅터가 그 교체를 감당할 수 없는 순간, 그에게는 연기된 죽음이 찾아올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 지나치게 길어진 삶이 지겨워진 빅터가 자의로 더 이상의 연장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사회경제적 지위 차이는 단순히 의료서비스나 건강관리에 대한 접근도를 낮춰 수명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실제 사회경제적 지위 차이는 몸의 염증반응과 디엔에이(DNA) 손상도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미국 연구진은 무리 지어 사는 개코원숭이 집단을 연구했습니다. 개코원숭이는 야생에서 50마리 정도가 하나의 그룹을 이뤄 살아갑니다. 암컷은 어미의 사회적 지위를 그대로 물려받지만, 수컷은 경쟁에 따른 서열 정하기로 계층이 결정됩니다. 연구진은 개코원숭이 수컷의 유전자 발현을 조사한 결과, 상위 서열의 수컷은 하위 수컷보다 선천적 면역 능력이 높았고, 특히 각종 염증에 저항하는 유전자의 발현율이 높았습니다.
의료시스템이 없는 자연 상태에서 어떤 개체의 면역력이 더 높다는 것은, 그 개체가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 결정적 바탕이 됩니다. 비슷한 연구는 사람에게도 진행했지만, 이에 대해 명확히 이야기하려면 좀더 지속적인 종단 연구가 필요합니다.
상위 소득 집단이 하위 소득 집단보다 더 오래 살고 건강하다면, 우리는 만수무강을 누리기 위해 일단 돈부터 최대한 벌어야 할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소득과 건강·수명이 비례관계를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소득이 늘어날수록 그 기울기는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한국통계학회에서 2017년에 발간한 ‘국민건강보험 표본코호트DB를 이용한 한국인의 건강기대수명 연구’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 연구 결과에서도 분명 소득 상위층은 소득 하위층보다 기대여명과 건강수명이 길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중위소득(하위 21% 이상~상위 31% 이하) 그룹의 기대여명과 건강수명을 표에 넣자, 그래프 기울기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중위소득 그룹의 기대여명과 건강수명은 상위 그룹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빈곤의 일정선을 넘어선다면 이후에는 소득의 많고 적음이 수명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적다는 것입니다.
이 결과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가진 것이 많으면 수명이 길어지고 더 건강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누려야 하는 기본 사항들의 하한선만 제대로 지킨다면 인간은 얼마든지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건강하게 오래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들보다 더 많이 벌기 위해 위만 바라보고 아등바등 애쓰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누리는 것에서 소외되는 이가 없도록 옆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늙음의 과학: 나이 들어가는 당신은 노화하고 있나요, 노쇠해지고 있나요.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의 나이 드는 것의 과학 이야기. 3주마다 연재.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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