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3대가 모여 살던 우리 집, 휴일 아침 8시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일곱 살 막둥이에게는 해님이 일어나 자신도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유독 아침잠이 없는 조부모에게는 이미 한낮이었고,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밤잠이 없어진 큰아이에게는 한밤중이었습니다. 직장인인 저와 남편에게는 깨어났지만 따뜻한 이불 안에서 나가고 싶지 않은 달콤한 시간이었고요. 왜 같은 집에 살면서 이렇게 다른 시간대를 사는 것일까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100년 전 올챙이를 들여다보던 과학자들의 이야기부터 해보려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두 과학자가 올챙이로 실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이의 종류에 따라 올챙이에게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측정하기 위해 무려 1만2천 마리의 올챙이를 여러 그룹으로 나누고 대조군에 소에서 추출한 근육, 즉 고기를 먹이고, 실험그룹은 각각 갑상샘, 부갑상샘, 부신, 송과선 추출물을 잘게 갈아 먹였습니다. 이 조직들은 체내에서 호르몬을 생산하는 곳이라 알려져 이들의 역할을 알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실험을 시작한 지 열흘쯤 되자 한 무리의 올챙이들이 집단으로 투명해졌습니다. 이들은 의도치 않게 투명 개구리를 만들어낸 셈이지만, 무엇이 이 올챙이들을 투명하게 변신시켰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 비밀이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1958년이었습니다. 미국 예일대학의 피부과 의사 에런 러너 박사가 송과선에서 올챙이를 투명하게 변신시키는 호르몬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이 새로운 호르몬에 멜라닌 색소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으로 멜라토닌(Melatonin)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지금은 수면-각성 행태를 조절하는 호르몬으로 잘 알려진 멜라토닌은 처음에는 이렇게 투명 올챙이의 발견에서 시작됐고, 그렇기에 피부 색소를 연구하던 피부과 의사가 그 정체를 가장 먼저 밝혀낸 것이죠.
송과선은 척추동물의 뇌 속에 있는 아주 작은 기관입니다. 모양이 솔방울을 닮았다 하여 송과선(松果腺, Pineal Gland)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한글로는 솔방울샘이라고 하지요. 얼마나 작냐면, 1.4㎏에 달하는 사람의 뇌에서 송과선이 차지하는 질량은 겨우 0.1g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덩치가 작다고 이름값이 덜한 것만은 아니듯 송과선은 그 크기에 비하면 잘 알려진 편입니다.
사실 송과선이 유명해진 건 과학자들 때문이 아니라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 덕입니다. 심신이원론을 주장한 데카르트는 송과선이 육체와 정신이 만나는 점이라고 주장했거든요.
데카르트가 왜 하필 하고많은 뇌의 다양한 기관 중에서 송과선을 꼬집어 그런 주장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일단 송과선의 위치가 절묘합니다. 송과선은 좌우 대뇌반구 사이 뇌의 중앙 부분 뇌실, 빛이 들어가는 시상하부 뒤쪽에 위치하며, 해부학적으로는 혈액뇌장벽(BBB·Blood Brain Barrier) 바깥쪽에 있습니다.
혈액뇌장벽이란 뇌를 둘러싼 뇌혈관 전체에 분포하는 일종의 선택적 필터입니다. 혈액뇌장벽이 있기에 혈액 속 노폐물과 독소, 약물 등 해로운 물질이 함부로 뇌로 들어오지 못하지요. 물리적으로 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음에도 뇌혈관장벽에서 분리된 곳이라는 절묘한 위치에 놓인지라, 송과선은 뇌와 몸을 잇는 중간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니 송과선에서 분비되는 멜라토닌도 단지 투명 올챙이를 만드는 것을 넘어선 다른 기능이 있지 않을까요?
멜라토닌의 정체가 밝혀지고 4년 뒤인 1962년, 드디어 멜라토닌이 생체주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알려집니다. 지용성 호르몬인 멜라토닌은 사람을 비롯한 척추동물뿐 아니라 자연계에서 곤충과 식물, 심지어 곰팡이와 박테리아에서까지 관찰되는 매우 흔한 호르몬입니다. 그만큼 오래되고 중요한 호르몬이라는 뜻이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루에 한 번 꼬박꼬박 자전하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한, 이 주기적 행태에 적응하지 못한 생명체는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면, 멜라토닌은 일몰(오후 7~8시)과 함께 서서히 분비량이 늘어 새벽 2~4시에 가장 높은 농도를 유지하다가 일출과 함께 점점 분비량이 줄어 한낮에 가장 적게 분비되지요. 멜라토닌 분비량이 늘어나면 심부체온이 약간 낮아지며 잠이 오고, 멜라토닌이 줄어들면 심부체온이 다시 올라가며 잠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이때 빛은 멜라토닌의 분비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지만, 빛이 없다고 멜라토닌이 과다 분비돼 계속 잠만 자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인체의 생체시계는 빛이 전혀 없어도 문제없이 돌아갑니다. 그래서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지하실이나 무너진 갱도 등에 갇힌 이들도 주기적인 수면-각성 행태를 보이죠. 하지만 빛은 멜라토닌의 분비량을 조절해 생체시계가 주변 환경에 맞게 동조되도록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신장은 늘 혈액을 걸러내 소변을 만들어내지만, 날이 더워 땀을 많이 흘리면 소변양을 줄이고 날이 추워 땀이 덜 나면 소변양이 늘어나는 것처럼, 멜라토닌도 주기적으로 분비되지만 빛이 그 양상을 조절해 신체의 수면-각성 행태가 하루의 일출-일몰과 어느 정도 맞게 동기화하죠.
그래서 계절에 따라 밤낮의 길이가 달라지면 멜라토닌의 주기 역시 동기화되므로, 낮이 긴 여름보다 밤이 긴 겨울에 유독 아침에 일어나기가 더 힘들어집니다. 또한 멜라토닌은 수면-각성 외에 다양한 생물에게서 섭식, 면역, 성적 행동, 체온 조절, 뇌 발달과 인지 능력, 노화 과정 등에 다양하게 미치는 복합적 호르몬입니다.
신생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잠을 안 자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수면을 관장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도 연령과 상관없이 모두 분비되지요. 다만 그 행태가 조금 다릅니다.
신생아의 경우, 멜라토닌의 주기성이 아직 제대로 잡혀 있지 않습니다. 멜라토닌은 태반을 통과할 수 있어 엄마의 몸에서 만들어진 멜라토닌이 탯줄을 타고 흘러 들어오기 때문에 태중의 아기는 멜라토닌을 조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출생 뒤 엄마의 몸에서 분리된 아기는 일종의 혼란기를 겪습니다. 멜라토닌을 분비하는 송과선은 갖췄지만 아직은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멜라토닌을 분비해야 하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죠. 그러다보니 신생아는 일정한 주기 없이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이는 주양육자를 수면 부족으로 힘들게 하는 주된 요인이 됩니다.
세상에 던져진 갓난아이의 송과선이 세상을 파악하고 적절한 멜라토닌 분비 주기를 챙기는 데는 보통 3개월이 넘게 걸립니다. 이즈음이 되면 아기는 밤에 5~6시간 정도 길게 자고, 낮에 1~2시간 정도 짧은 잠을 두세 번 자는 수면 행태가 만들어져 시도 때도 없이 깨는 아기로 인해 정신줄을 반쯤 놓았던 부모의 숨통을 약간 틔워줍니다. 신생아 육아에 지친 엄마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백일의 기적’은 바로 낯선 세상에 갑자기 던져진 아기가 세상에 적응한 1차 결과인 셈입니다. (물론 이런 수면 행태가 잡히는 것은 아기마다 차이가 있어, 어떤 아기는 2개월쯤에도 가능하지만 어떤 아기는 2년씩 걸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주기가 잡힌 멜라토닌 분비 행태는 유아기를 거쳐 유년기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밤으로 집중돼 낮잠이 점점 줄고 대신 밤잠을 길게 자는 것으로 모입니다. 비단 착한 어린이뿐 아니라 대다수 어린이는 가만 놔두면 자연현상에 맞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아이들이 늦잠을 자는 건 늦게 잤기 때문이며, 늦게 잠드는 건 그만큼 아이들을 유혹하는 다양한 자극에 노출됐기 때문이죠.
아침을 선호하는 멜라토닌의 ‘착한’ 분비 형태는 초등학생 시절까지 유지되다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바뀝니다. 이전에 비해 멜라토닌의 최대 분비 시간이 2~3시간 정도 뒤로 밀리죠. 이로 인해 청소년기는 밤엔 말똥말똥하고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올빼미족이 대거 양산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시기에 분비되는 성호르몬이 멜라토닌의 분비 주기를 방해하기 때문이라는 연구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시기는 늦더라도 청소년기는 멜라토닌의 양만큼은 최대로 분비되는 시기이므로, 이 나이 때의 아이들은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자고, 잠만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도 다시 기력이 쌩쌩하게 돌아오는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늦춰졌던 멜라토닌 최대 분비 시기는 성인기가 되면 다시 앞당겨지며, 안정적인 수면 행태가 고정됩니다. 하지만 이 상태가 계속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 들수록 깊이 잠들기가 어려워지며, 꾸벅꾸벅 졸다가도 한번 잠이 깨면 다시 잠들 수 없어 이른 새벽에 서성거리는 일이 자주 생기고, 잠자고 나도 몸이 개운치 않습니다. 이건 나이 들수록 송과선의 기능이 떨어져 멜라토닌 분비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멜라토닌이 부족하니 몸은 잠을 원해도 그 잠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죠. 멜라토닌 부족은 노화의 결과일 뿐 아니라, 멜라토닌 자체가 노화 속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다면 멜라토닌을 보충해주는 것이 노화 속도를 늦출 수 있을까요? (이 내용은 다음 칼럼에 이어집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늙음의 과학: 나이 들어가는 당신은 노화하고 있나요, 노쇠하고 있나요.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의 나이 드는 것의 과학 이야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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