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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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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일, 조혈모세포 이식을 기다리는 시간

제대혈 수거가 기본 시스템이 된다면 오랫 동안 잔인한 시간을 보내지 않을 텐데
등록 2021-04-10 20:37 수정 2021-04-11 10:54
서울 한 종합병원의 의료진이 수거한 제대혈의 보관적합성 검사를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서울 한 종합병원의 의료진이 수거한 제대혈의 보관적합성 검사를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아이의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면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언제든 출발할 수 있도록 출산용품을 정리한 ‘출산 가방’을 싸놓는 일이지요. 갈아입을 속옷과 두툼한 양말, 오로(출산 이후 자궁에서 나오는 분비물)용 패드와 물티슈, 양치도구, 세면도구, 기초 화장품, 빗과 머리끈, 손수건, 복대와 함께 퇴원할 때 입을 옷과 아기 옷·모자, 손싸개와 발싸개까지 모두 챙겨넣으니 2박3일 입원용 가방이 꽤 묵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대혈 기증 키트가 든 상자를 가장 먼저 꺼낼 수 있도록 맨 위에 챙겨넣었습니다. 얼마 전 제대혈 기증 신청을 한 병원에서 보내준 키트였습니다.

제대혈 기증했지만 ‘부적합’ 판정

당시 제가 살던 곳은 서울이었기에, 서울특별시제대혈은행 누리집에 들어가 기증 신청을 했습니다. 직원이 기증 의사를 전화로 다시 한번 확인하더군요. 그리고 며칠 뒤 택배로 제대혈 기증 키트가 배송됐어요. 제대혈 기증 키트 안에는 서명해야 하는 각종 동의서와 헌혈용 혈액팩처럼 생긴 제대혈 채취·보관 키트, 산모 혈액을 채취해 담을 수 있는 작은 주사기와 보관 용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동의서만 꺼내 체크하고 다시 상자에 넣어 출산시 가져가서 간호사 혹은 의사에게 전달하고 제대혈 기증 의사를 밝히면, 출산 뒤 의사가 산모와 태아의 제대혈을 키트에 보관해줍니다. 제가 할 일은 출산 이후 기증 기관에 전화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전화를 걸고 하루 내에 직원이 와서 직접 제대혈 키트를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죠.

아이를 낳고 신생아와 함께 일상을 새로이 꾸려가야 하는 시간은, 겪어본 분이라면 알겠지만, 도저히 무언가를 제대로 챙길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제대혈 기증은 했지만 출산 이후에는 기증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었습니다. 제대혈 기증이 실감난 것은 출산 몇 개월 지나서 기증 병원에서 보낸 제대혈 기증서와 검사 결과지가 든 서류봉투가 도착한 이후였습니다. 제대혈도 일종의 혈액이므로, 누군가에게 이식되기 위해서는 혈액형을 파악해야 하고, 병원성 바이러스와 다른 감염성 병원체에 오염돼 있지 않아야 하므로 기본 혈액 검사를 합니다. 아이의 혈액형은 저와 같았고, B형 간염 바이러스를 비롯해 다른 감염체 오염도 없었습니다. 아기의 기본 검사에서 별 이상이 없다는 말에 약간은 안도했던 마음이 약간 복잡해진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기증하신 제대혈은 유핵세포 수 부족으로 인해 연구용으로 보관 및 폐기됩니다’라는 취지의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누군가를 위해 쓰이기 바라는 마음에서 기증했는데, 그 가능성이 애초부터 없다니 약간은 허탈했죠. 이는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 아이 모두 제대혈을 기증했지만, 같은 내용의 결과를 연이어 받아들자 의문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기증 혹은 채취되는 제대혈 중 제대로 보관되고 쓰이는 것은 얼마나 될까요?

제대혈 기증을 신청할 수 있는 서울시제대혈은행. 누리집 화면 갈무리

제대혈 기증을 신청할 수 있는 서울시제대혈은행. 누리집 화면 갈무리

얼마나 보관되고 제대로 쓰일까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 등록된 국가지정 기증 제대혈은행(순수 기증만으로 운영)은 가톨릭조혈모세포은행, 대구파티마병원제대혈은행, 동아대학교병원제대혈은행, 서울특별시제대혈은행 등 총 4곳입니다. 이 밖에 가족 제대혈 보관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 업체 중에서도 기증 제대혈은행을 동시에 운영하는 곳이 5개 있어, 총 9곳의 제대혈은행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제대혈은 직접 직원이 나와서 수거해 가는 시스템이어서 거리가 지나치게 멀면 기증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증을 원한다면 출산하는 병원 근거리의 제대혈은행부터 알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2019년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발간한 ‘혈액 및 제대혈 관리실태’ 감사보고서를 보면, 기증받은 제대혈 총 5만5390유닛 중 59%에 이르는 3만2617유닛이 ‘기증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기증된 제대혈 중 부적격 판정을 받는 비율이 더 높습니다. 이 중 바이러스 감염이나 기타 오염으로 인한 폐기는 극히 일부이고, 유핵세포 수 부족으로 인한 부적합 판정이 대부분입니다.

유핵세포란 세포 안에 유전물질을 담은 세포핵을 둘러싼 핵막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세포를 말합니다. 세포 상태가 나빠지면 핵막에 구멍이 나면서 세포핵이 뭉개지기에, 세포핵이 뚜렷이 존재하는지는 일차적으로 세포의 건강 상태를 가늠하는 간단한 지표가 됩니다. 게다가 적혈구는 핵이 없기 때문에, 적혈구를 제외한 수입니다. 기존 제대혈 관리법에 따르면, 제대혈 1유닛당 유핵세포 수가 8억 개 이상(보존 처리 뒤 7억 개 이상)이어야만 치료용 기증에 적합하다고 기준선을 둔 바 있습니다. 기존 연구 결과, 기증된 제대혈이 무사히 수혜자에게 생착돼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총 유핵세포 수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특히나 기존 조혈모세포 이식은, 조직적합항원(HLA)이라는 일종의 면역학적 지표 6개가 모두 일치해야 이식이 가능한데, 아직 분화가 덜 된 제대혈은 이 중 한두 개가 달라도 이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HLA 지표 일부가 부적합하면, 완전히 일치할 때보다 1개 불일치 때는 유핵세포 수가 적어도 30% 이상 더 많아야 하며, 2개 불일치 때는 유핵세포가 70% 이상 많아야 한다고 권고(‘국내 제대혈 이식 및 기증 제대혈은행 현황’, 신수·노은연·윤종현, <대한수혈학회지> 제24권 2호(2013), 리뷰 아티클)하는 등, 제대혈 내 유핵세포 수는 이식 가능성을 판가름하는 매우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그런데 법령 개정으로 2021년부터 1유닛당 유핵세포 수가 11억 개를 넘어야 기증용으로 인정하도록 기준이 상향 조정될 예정이므로, 채취된 제대혈이 기증 부적합 판정을 받을 가능성은 더 커졌습니다.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누리집 화면 갈무리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누리집 화면 갈무리

가족 제대혈은 보관 기준을 충족할까

국내의 경우 제대혈 기증 비율은 전체 보관 제대혈 중 10%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민간 업체에 가족 제대혈 형태로 유료 서비스로 보관되는 것이 50만 유닛이 넘습니다. 그런데 기증 제대혈을 얻는 방법과 가족 제대혈을 얻는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이 중 얼마나 보관 기준을 충족하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물론 가족용으로 개인이 위탁해 보관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의 경우, 좀더 꼼꼼하게 제대혈을 채취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제대혈 자체가 80~100㎖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적기 때문에, 조금 더 채취한다고 그 양이 크게 더 많아지지 않고 합격선을 넘어갈 확률 역시 크게 올라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유효 수가 부족하다면, 훗날 정말 제대혈이 필요한 경우 보관된 제대혈을 단독으로 사용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물론 유효 수가 부족한 경우라도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기존 연구 결과, 제대혈 이식에서 면역학적 일치도가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아도 이식이 가능하기에 서로 다른 두 명에게서 얻은 제대혈을 합쳐서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사람에게는 태반이 하나밖에 없고 제대혈도 단 한 번밖에 채취할 수 없으니, 내 것이 부족해 추가하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제대혈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공공 제대혈은행에 기증된 제대혈 중 가장 적합한 것을 찾아서 추가해야 합니다. 요행히 공공 제대혈은행에서 이를 찾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세포 냉동 보관 연한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세포를 적절히 처리해 영하 198도 극저온 액체질소에 보관하면, 세포 생존 시계를 정지시켜 삶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보관 연한은 대체로 5년 내외로, 이후에는 해동시 세포 해동률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100년을 보관해주는 서비스에 가입했다 치더라도 100년 뒤 내가 그 세포를 이용할 가능성은 극히 낮을 뿐 아니라, 그쯤 되면 해동시 유효 세포가 얼마나 남아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기에 아기는 시간이 지나면 태어날 때보다 수십 배 성장하기 마련입니다. 몸이 커지면 그만큼 생물학적 요구량도 많아지는 건 당연하지요. 연령대(어릴수록 성공률이 높습니다)가 제대혈 이식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이 되는 건 이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세계 각국에서는 공공 제대혈은행을 통해, 보관 연한(5년 전후)이 지난 것은 폐기하고 새로운 제대혈을 꾸준히 보충해 일정 수 이상 제대혈을 보유하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 개인이 각자 자신의 제대혈을 수십 년간 보관하는 것보다 그 활용도가 훨씬 높다고 말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는 국민의 면역학적 다양성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아서, 각각의 HLA 타입을 고려해 5만 유닛 정도의 제대혈을 보관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여겨집니다.

확장된 공공 제대혈은행, 상급병원이라도

2019년 기준 골수 등 비혈연 간 조혈모세포 이식을 위해 기다리는 시간은 평균 649일입니다. 이들의 병세 위중함을 생각한다면 2년 가까이 기약 없이 기다리게 하는 것은 정말로 잔인한 일입니다. 이들의 오랜 기다림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 바로 확장된 공공 제대혈은행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보관을 원치 않거나 건강상 문제로 보관할 수 없는 이들을 제외하고 모든 제대혈이 수거되는 것이 기본 시스템이 된다면, 적어도 아이가 가장 많이 태어나는 상급병원 수십 곳의 산부인과에서만이라도 이런 제도가 시행된다면, 이들이 이토록 오랫동안 잔인한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공공 재원을 투입해 사회적 제도를 확립해야 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부터일 겁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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