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아이를 낳던 순간의 기억은 이제 희미합니다. 그 뒤 이어진 열 몇 해의 시간 흐름과 출산 뒤 인구 증가를 위해 진화 과정이 준비했다는 ‘망각 호르몬’(출산시 분비돼 산고를 잊게 해준다는 물질의 통칭. 산고를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둘째 아이 낳는 이의 비율이 0에 수렴할 것이므로 이 호르몬이 필요하다는데,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출산 전후로 건망증과 기억 저하가 심해진다고 토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탓이겠지요.
그러나 출산하는 순간 느꼈던 감각의 기억 한 조각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제가 출산한 병원은 르부아예 분만법을 실시하는 곳이라, 아기가 태어날 때 눈이 부시지 않도록 조명을 최소한도로 낮춰 분만실은 어두컴컴했고 사람들은 거의 말하지 않아 조용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스스로 안정적인 호흡을 할 때까지 탯줄을 끊지 않고 기다려주고, 이후 아기를 미리 따뜻한 물을 받아둔 아기 욕조에 넣어 엄마 곁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간호사가 아기를 씻기는 동안 엄마 아빠가 아기의 양손을 하나씩 잡고 있으라 했습니다. 사실 엄마 아빠가 아기 손을 잡는다기보다는, 아기 쪽에서 엄마 아빠의 손가락을 붙잡고 있다는 게 맞는 표현일 듯합니다. 그때 제 손끝에 느껴지던 감각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 세게 잡으면 살점이 밀리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연약하고 몽글몽글한 피부를 가진 아기가, 고사리순보다 가느다란데도 손톱과 마디의 주름까지 완벽하게 갖춘 작은 손가락이, 갓난아기의 것이라고는 예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악력으로 제 손가락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아기의 조그만 손이 제 손끝을 잡았을 때, 우리는 이제 정말 하나로 이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손으로는 간지럼을 잘 못 태우는 이유
기괴한 사진과 삽화가 많이 나오는 해부학책과 신경학책에서도 가장 오래도록 기억되는 이미지는 호먼큘러스(Homunculus)였습니다. 호먼큘러스는 ‘작은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 장차 인간이 되는 작은 ‘씨앗’ 인간을 일컬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건 없었고, 호먼큘러스라는 단어는 신경해부학에서 대뇌피질이 신체에서 관장하는 부분의 비율에 따라 인체 비율을 재구성한 모형입니다.
신경해부학적 호먼큘러스는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감각의 민감도를 표현하는 감각 모델(Sensory Model)과 세밀한 조절 능력을 나타내는 운동 모델(Motor Model)입니다. 두 버전의 차이는 손이 조금 더 크고 작은 것밖에는 없어 보입니다. 물론 어떤 버전을 봐도 보이는 건 손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맨눈으로 보기엔 손이 인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기껏해야 2% 정도지만, 우리 대뇌피질의 감각신경과 운동신경은 절대적으로 손을 편애합니다. 민감하다고 여겨지는 성기와 입술조차 손의 감각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타인에게 간지럼을 태워달라 해보고, 가장 간지럽게 느껴지는 부분에 직접 간지럼을 태워보세요. 아마 대부분 자신이 만질 때는 훨씬 덜 간지럽게 느낄 겁니다. 타인이 내 팔을 쓰다듬을 때는 접촉하는 피부의 감각에 집중할 수 있지만, 내 손으로 쓰다듬을 때는 손이 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커서 손의 감각이 먼저 느껴지기에 간지럼이 덜 느껴집니다. 움직임은 또 어떤가요? 우리 몸 전체의 뼈는 약 206개(성인 기준)인데, 이 중 4분의 1에 해당하는 54개의 뼈가 손에 몰려 있습니다. 그래서 손은 물건을 잡고 쥐고 누르는 간단한 동작뿐 아니라 글쓰기, 바느질하기, 세공하기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동작마저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답니다.
인간을 있게 한 손
이상희·윤신영 공저의 <인류의 기원> 한 장에서는 인간이 지금처럼 큰 뇌를 가진 영장류가 될 수 있었던 건, 손을 이용해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출력이 있으려면 입력값이 있어야 합니다. 현생인류의 뇌가 고인류의 것보다 3배 이상 커지려면 이 커다란 뇌를 만들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사람은 식물처럼 스스로 광합성을 하지 못하니 이를 오로지 먹어서 충당해야 하는데, 자연에서 먹거리란 내가 더 먹고 싶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연계에는 식당도 마트도 하다못해 편의점이나 자판기조차 없으니까요.
자연계에서 먹거리를 구하기 쉬웠다면, 우리 몸은 절대 지금처럼 악착같이 지방을 몸에 저장하도록 진화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뇌가 커지기 위해서는 기존에 먹던 것을 훨씬 더 많이 먹거나, 혹은 기존에 먹지 않았던(혹은 못했던) 다른 먹거리를 구해야 합니다. 이때 고인류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손’입니다. 고인류는 직립보행을 했기에 손이 자유로웠고, 이 자유로운 손으로 돌을 들어 커다란 포식자들이 먹다가 두고 간 동물 사체에서 뼈를 쪼개고 두개골을 쪼개 골수와 뇌수를 취할 수 있었습 니다.
대퇴골같이 긴 뼈 속에 들어 있는 골수는 혈액세포를 만드는 조직이기에 영양분이 풍부했고, 뇌조직은 지방 성분이 가장 많은 함량을 차지(물론 물은 제외하고 말입니다)하기에 훌륭한 영양공급원이 돼주었습니다. 처음 등장할 때는 초등학교 1~2학년 정도의 체격과 작은 뇌용적을 지녔던 고인류는 이를 통해 잉여 열량과 영양분을 얻었고, 차츰 체격과 뇌용적을 키우면서 현생인류와 비슷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제 손을 써서 벌어먹을 수 있었던’ 인류 조상의 특성이 지금 우리를 있게 한 근본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손을 이용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왔습니다. 손으로 나무 열매를 따고 사냥감을 잡고 잘 익은 작물을 거두었습니다.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성을 쌓고 길을 닦았습니다. 도구를 만들고 문자를 새기고 기계를 만들고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다른 한편에서, 인간은 손을 써서 스스로 인간성을 말살하기도 했습니다. 존재하는 것을 부수고,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데도 손은 제 몫을 너무 잘해냈으니까요. 인류가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힌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요.
손을 놓지 않은 건 ‘강제추행 아니다’?
얼마 전 우연히 손에 대한 기사를 하나 보았습니다. 회식 자리에서 허락 없이 부하 직원의 손을 잡고, 상대가 분명히 거절 의사를 나타냈는데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아 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사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졌다는 것입니다. 법원의 판결 근거는 “손은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신체 부위가 아니며” 법전에 명시된 강제추행의 행위는 “특정 행위 자체가 성욕의 흥분, 자극 또는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로서 건전한 상식이 있는 일반인이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볼 만한 징표를 가지는 것이어서 폭행 행위와 추행 행위가 동시에 피해자의 부주의 등을 틈타 기습적으로 실현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판결을 보고 갑자기 명치끝이 꽉 짓눌리는 듯했습니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면 흔히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명시된 신체 부위가 아니더라도, 신체의 그 어떤 부분에도(심지어 신체 자체가 아닌 그 부산물에도) 성욕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이는 넘쳐납니다. 그리고 애초에 신체에서 성적인 것과 연관 지을 수 있는 부위가 문제가 아니라, 싫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는데도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상대가 싫다는데, 상대의 몸을 만지거나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면, 이는 ‘강제적 물리력의 행사’임이 틀림없는데, 그 부위가 손이라는 이유로 ‘강제’보다는 ‘추행’에 방점을 찍은 판결이 석연치 않습니다. 만약 단지 부위가 손이어서 문제가 되었다면, 그들에게 호먼큘러스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손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얼마나 많은 것을 지각할 수 있는지 우리는 쉽게 잊습니다. 어쩌면 피해자에겐 손으로 느껴지던 감각이 아주 오랫동안 뇌리에 끔찍한 기억으로 저장될 가능성이 클 텐데 말이죠.
손을 손답게 쓰자
오랜만에 아이와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 이제는 훌쩍 커버려 저만치 앞서가는 아이를 불러 오랜만에 손잡고 가자고 했습니다. 이제는 제 눈높이보다 높아진 아이의 눈길은 내민 엄마의 손을 슬쩍 보더니, 다행히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제는 엄마 손보다 커버린 아이의 손을 잡고 걸으니, 내가 세상에 내어놓은 생명이, 그 작았던 손가락이 이처럼 자란 것이 새삼 벅찬 느낌이 들어 더 손을 꼭 잡고 싶어졌습니다. 인간의 손이 그토록 예민하게 발달하고 그렇게 정교하게 구성된 건,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을 풍요롭게 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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