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드라마에서 ‘화목한 가정’을 대표하는 흔하디흔한 클리셰가 있습니다. 부모(대개는 남편 부모이고 가끔은 남편 조부모까지 포함)와 아들 내외, 성인이지만 아직 독립하지 않은 남편의 형제자매까지 예닐곱 명의 어른만 가득 앉은 아침 식탁. 이리저리 종종거리며 가족 식사를 챙기다가 제일 늦게 구석 자리에 앉은 새며느리가 급하게 국 한술 뜨다 말고 헛구역질합니다. 그 소리가 그리 큰 것도 아닌데, 저마다 떠들던 가족은 귀신같이 그 소리를 알아채고 모든 행동을 멈춘 채 며느리만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 식구는 환호하거나 박수를 치면서 기뻐하고 그 순간부터 며느리는 가사노동에서 제외되며 모든 가족이 부산을 떨어대기 시작합니다. 조금 전까지 물 한 잔도 제 손으로 떠다 마시지 못해 며느리 손길을 불렀던 이들이 갑자기 제 발로 멀쩡하게 돌아다니며 며느리가 빈 그릇 하나라도 들면 큰일 날 듯이 손사래를 치거든요. 며느리는 순식간에 가족 내 가장 낮은 서열에서 벗어나, 이젠 손대면 깨질 듯 조심스럽고 연약한 유리인형이 되어버립니다. 그녀는 임신했거든요.
낮은 서열에서 유리인형으로
어린 시절, 이런 드라마를 보고 자랐기 때문인지 임신하면 그저 가만히 있어야 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첫아이를 임신한 그 몇 달 동안이 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운동하던 시간이었습니다. 고대하던 아이를 배고, 초기 불안한 시기를 넘어 드디어 안정기라는 임신 16주(임신 4개월)를 넘어서면서 인생 처음으로 꾸준히 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정기에 들어서고 다니던 난임병원에서 졸업(난임전문병원에선 안정기에 들어선 임신부를 다른 병원으로 보내거나 담당 의사를 바꿔줍니다. 이를 ‘졸업’이라고 하는데, 난임병원의 특성상 임신을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의 간절함에 이들의 기쁨이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여겨 배려하는 거죠)한 뒤, 새로 찾아간 여성병원의 담당의사는 운동을 권했습니다. 임신 중 지나친 체중 증가는 여러모로 좋지 않고, 자연분만을 위해서라도 운동하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연’분만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내 마음을 찔렀습니다.
아이를 얻기 위해 많은 의학 처치를 받았습니다. 임신 전엔 아기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임신 기간이 자꾸 지나가자 그동안 눌러둔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그 걱정의 뿌리는 아이가 ‘자연스럽지 못한 과정’을 통해 생겨났다는 것으로 이어졌지요. 아이는 시험관에서 만들어져서 수정 뒤 첫 일주일은 그곳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영하 197℃의 액체질소 탱크에서 6개월 동안이나 시간을 멈춘 채 얼어 있다가 해동돼, 제 몸속에 깃들이는 과정을 거쳐야 했지요.
현대 의학은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했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기적이라며 진심으로 축하해줬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었나봅니다. 기뻐하는 제게 누군가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아기가 괜찮을지, 답 없는 물음을 걱정을 가장해 물었습니다. 심지어 자연의 섭리를 위반하는 일 같아 소름이 돋는다고 얘기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순간, 서늘하고도 무거운 침묵의 감정이 등줄기를 스치고 내려갔습니다.
기적이냐 소름 돋느냐
그때 느낀 감정의 종류를 당시에는 제대로 정의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감정을 정의 내릴 수 없으니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몰랐죠. 대응하지 않는다고 상처가 남지 않았다는 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나와 내 아이의 존재에 대한 부정에 가까운 느낌이었으니까요. 생명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재생산 과정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하나의 인간이기 이전에 생명체로서 가져야 하는 존재 의미가 평가절하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첫아이를 낳기 전 자연분만에 집착했고 모유 수유를 고집했습니다. 임신 16주부터 출산 때까지, 주중에는 임신부 요가와 수중 에어로빅 수업을 매일 들었고, 주말에는 한강변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렇게 운동한 게 도움이 됐는지 운이 좋았는지 모르지만, 첫아이 출산은 잔뜩 겁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수월하게 넘어갔고, 모유 수유에도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그제야 좀 안심이 되었습니다. 뭔가 해냈다는 안도가 느껴지자 주변이 제대로 보였습니다.
산후조리원에서 만난 또래 엄마들은 아기를 만난 기쁨과 함께, 제가 느꼈던 감정을 저마다 다른 이유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자연분만을 시도하다가 시간이 길어져 아기가 태변을 보는 바람에 감염 위험이 있어서 급하게 수술했고, 아기는 병원에 며칠 입원해야 했습니다. 아기가 나오다가 산도에 걸려 흡입기를 써서 빨아내 머리 모양이 변형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른둥이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있다가 퇴원한 뒤 여전히 또래보다 작은 아이도 있었습니다. 엄마들은 현대의 의학 처치만으로 아기가 별 이상 없이 자랄 것이라 믿었지만, 아이를 자연스럽게 세상과 만나게 해주지 못해 미안해했습니다.
아이를 낳는 데 별문제 없던 이들이라고 마음 편한 건 아니었습니다. 젖이 잘 돌지 않아 아기에게 충분한 수유를 할 수 없는 이도 있었고, 젖은 도는데 함몰 유두나 유두 균열로 젖을 물릴 수 없거나 유선염으로 고생해서 어쩔 수 없이 젖을 말리는 이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아기가 모유를 거부하고 젖병만 찾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럴 때 가족은 오히려 위로보다 상처를 더하는 일이 많습니다. 가뜩이나 뭔가 잘못하는 건 아닐까라고 위축된 엄마 앞에서, 자연분만을 해야 혹은 모유 수유를 해야 엄마 몸도 금방 회복되고 아기도 건강하게 잘 자라는데 그러지 못해 어떡하냐는, 또다시 걱정을 가장한 답 없는 물음을 더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가족과 친지, 지인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내 몸이 이상해서 아기를 낳고 젖을 물리는 ‘자연스러운’ 일조차 제대로 못한다는 사실을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서 확인하면, 아직 산고에서 회복되지 않은 몸과 마음은 쉽게 바스러지고 맙 니다.
수치심과 굴욕감의 차이
브레네 브라운은 저서 <수치심 권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다양한 층위로 분석합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부당한 경험을 하고, 그 순간 느낀 굴욕 혹은 수치는 다른 감정보다 더 오래도록 뇌리에 살아남으며 마음을 시시때때로 긁어댑니다. 이때 굴욕감과 수치심의 차이는 동일한 사건에 책임의 원인을 어디에 두느냐로 갈라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데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경우, 그 부정적인 감정의 원인을 상황과 상대에게 둔다면, 즉 상대가 원체 나쁜 사람이거나 혹은 지금 상황이 일시적으로 안 좋아서 이런 일을 겪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감정의 결은 굴욕감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부당한 일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말해 내가 힘이 없어서 내가 쉽게 보여서 내가 뭔가 빌미를 줘서 이런 일을 겪는다고 여기면 수치심이 몰려옵니다. 굴욕감은 부정적인 행동에 느끼는 정당한 부당함이지만, 수치심은 내가 존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이기에 부정당했다는 절망적인 수용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굴욕을 느낀 이들은 대개 분노하고 이런 상황을 다시 만들지 않으려 하지만, 수치를 느낀 이들은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 오히려 내면을 더욱 할퀴어 상처를 내곤 합니다.
아이를 갖고 낳고 젖을 물려 키우는 일은, 여성에게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며 심지어 숭고한 일이라는 사회적·문화적·전통적 가치관과는 달리, 실제 이 과정은 낯설고 부자연스러우며 나아가 힘들고 지난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현상’이라는 한마디로 뭉뚱그려 입을 틀어막습니다. 날아다니는 풀벌레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일을 왜 넌 제대로 못하냐고 한다면, 수치감은 한층 더 깊어지고 비밀스러워집니다. 그래서 자신이 겪은 부당함을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죠.
의학적 도움, 현대사회의 ‘자연스러운’ 일
오랫동안 불편하게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던 감정이 명확해지자, 제가 과거에 해야 했던 정확한 대응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를 원했고, 그 아이를 얻기 위해 합법적으로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감내했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의학의 도움을 받은 건 현대사회에선 오히려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폐렴에 걸렸는데 자연치유를 해야 한다고 산속에 들어가서 약초를 캐먹거나, 공기 좋은 곳에 산다는 정령에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폐렴에 걸렸으면 병원에 입원해서 항생제를 사용하고 산소 공급을 해주면서 의학적 치료에 몰두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요. 저마다 처한 환경이 다릅니다. 보조생식술을 써서 아이를 갖든, 제왕절개를 하든, 인큐베이터에서 첫날을 맞이하든, 모유 대신 조제분유를 먹이든, 그건 모두 현대사회에서 아이의 생존을 위해 다양한 선택지 중 최적화된 것을 적용한 적절하고, 적합한 판단입니다.
그러니 저는 걱정을 가장한 상처 주는 말을 한 사람에게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운 줄 알라고 지적했어야 합니다. 내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상대의 경솔하고 생각 없는 행동이 잘못됐으니까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융통성 있게 최적의 결과를 추구하는 게 생명체가 지닌 자연스러움의 본질입니다. 적어도 아이를 가지고 낳고 돌보는 생물학적 과정에서만큼은 어떤 방식도 합법적으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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