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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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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연구하다 자신을 잊은 사람들

내 자아를 치유하라는 명령이 왜 나를 고통으로 이끄나
등록 2026-10-22 21:25수정 2026-10-29 14:55
이재명 대통령이 2026년 10월19일 언론인들의 취재 공간인 청와대 춘추관 로비에서 기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청와대통신사진기자단

이재명 대통령이 2026년 10월19일 언론인들의 취재 공간인 청와대 춘추관 로비에서 기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청와대통신사진기자단


대통령의 소셜미디어가 논란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엑스(X·옛 트위터)를 활용해 국민과 직접 소통해왔습니다. 이 소통 방식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커지자 대통령이 에스엔에스(SNS)를 끊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옵니다. 그래도 대통령은 엑스를 멈출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이 소셜미디어의 즉각적 반응에 중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도파민을 제공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도파민에 중독되는 것이 SNS 세계의 역설이니까요. 에바 일루즈의 ‘감정 자본주의’는 ‘좋아요’ 수를 민심의 지표로 착각하는 정치인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타인의 감정이 성과 지표가 될 때

 

사람들을 소셜미디어에 빠지게 하는 것은 ‘좋아요’라는 보상 버튼입니다. 좋아요(LIKE)는 무언가가 흡족하다는 감정 표현입니다. 좋아요를 누른다는 건 의미상 상대에게 내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숫자로 바뀌는 순간 좋아요는 더는 감정이 아니게 됩니다. 좋아요가 숫자 ‘+1’이 된 다음에는 그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좋아하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보이는 건 그 사람의 살아 있는 감정이 아니라, 스쳐 지나간 감정의 흔적입니다. 타인의 호감이라는 질적 경험이 셀 수 있고 비교할 수 있는 수치로 바뀐 겁니다.

이 수치는 기록돼 계정 주인의 영향력과 평판을 만들어냅니다. 타인의 감정이 성과 지표가 되었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 감정이 숫자로 변환되는 과정은 일루즈가 ‘감정 자본주의’에서 분석한 ‘감정의 사물화’ 원리를 설명하기 좋은 예시입니다. 감정의 사물화란 감정이 살아 있는 경험에 머물지 않고 관리의 대상으로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일루즈가 책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감정을 조직하고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20세기 초 경영계에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심리학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인간관계를 다루는 심리학은 노사 갈등의 원인이 한정된 자원이 아니라 뒤엉켜 헝클어진 감정에 있다고 봤습니다. 좋은 경영자가 된다는 것은 사내에서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감정들을 간파하고 이를 냉정하게 처리할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감정지능(EQ) 개념이 처음 출현했을 때 경영자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이후 감정행위를 등급화할 도구가 고안되면서 감정능력 개념은 점점 정교해졌습니다.

 

감정이 관리 대상이 될 때

 

경영계에서 시작된 감정관리의 심리학은 영화와 실용서의 붐을 타고 사회 전 영역으로 전파됩니다. 감정을 잘 다루는 사람은 단지 정서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서 더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감정이 자본이 된다는 말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본주의에서 감정이 중요한 관리 대상으로 부상한 이유는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소통의 무기가 된다는 심리학의 교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감정을 잘 다룰 수 있게 됐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감정이란 본래 순간적이고 맥락적인 것입니다. 폭풍우처럼 순간 솟아올랐다가 금세 사라지기도 합니다. ‘분위기’에 따라 나도 모르게 흘러가는 것이 감정입니다. 이런 감정을 글자로 옮기는 것은 감정을 특정한 공간에 고정하는 일입니다. 감정을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나도 몰랐던 감정을 발견하고 타인과 공유할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언어로 표현된 감정을 살아 있는 경험의 대체물로 취급하는 태도입니다.

감정을 설명하는 언어가 감정 그 자체를 대신하기 시작하면, 살아 있던 감정은 이해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바뀝니다. 이 과정에서 감정은 탈맥락화돼 우리의 육체와 분리됩니다. 그렇게 못박힌 감정은 원래 의미를 상실한 사물화된 감정입니다. 좋아요를 많이 받는 사람은 감정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을 잘 사물화하고 조절해 원하는 반응을 얻는 데 능숙한 사람입니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차원에서 감지와 인지를 구분해 설명합니다. 인지란 대상의 죽은 특징들을 토대로 한 인식이며, 감지란 살아 있는 능동적 속성에 대한 경험을 말합니다. 내가 타인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말로 완전히 표현되지 않는 표정, 몸짓, 분위기와 관계의 맥락을 통해 감지하는 일입니다. 사물화된 감정을 상대하는 데 익숙한 현대인들은 인지한 것을 감지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좋아요 수를 확인하고 이모티콘을 주고받으면서 타인의 마음에 닿았다고 믿지만 실제 얻은 것은 죽은 감정들의 목록입니다.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가 합리적 바보를 만들어낸다고 말합니다. 감정 자본주의의 역설이 여기에 있습니다. 감정을 잘 안다고 믿을수록 감정에 관한 지식과 감정 그 자체를 혼동하게 됩니다. 감정을 설명하는 데 능숙해질수록 정작 살아 있는 감정에선 멀어지는 것입니다.

‘감정 자본주의’, 에바 일루즈 지음, 김정아 옮김 돌베개 펴냄, 2010년

‘감정 자본주의’, 에바 일루즈 지음, 김정아 옮김 돌베개 펴냄, 2010년


내 감정이 문제일까

 

대통령의 엑스 사용 문제도 여기에 있습니다. 소셜미디어에 대한 대통령의 집착을 보면 국민과 소통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국민의 감정을 수치화된 소셜미디어의 반응으로 대체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깁니다. 소셜미디어의 반응은 민심 일부가 스쳐간 흔적일 뿐 민심 자체는 아닙니다. 숫자로 확인할 수 있는 반응에 익숙해질수록 숫자로 나타나지 않는 마음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감정을 관찰하고 관리하는 일로 바뀌었다면, 같은 변화가 자기 자신에게도 일어납니다. 자기 감정 역시 관찰과 분석의 대상이 됩니다.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왜 그렇게 느끼는지, 내 감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묻게 됩니다.

여기서 ‘자아’라는 곤란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자아는 감정이 기거하는 장소입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자아란 누구에게나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었고 자기소개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진짜 자아’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불투명한 것이 되었습니다.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가 형성된 시점을 20세기 초 프로이트 이론의 대유행에서 찾습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은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근본적으로 다시 묻게 했습니다. 자아가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치료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선은 상담실을 벗어나 일상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트라우마, 번아웃, 가스라이팅, 우울 같은 말을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기분은 추적 관찰의 대상이 되고 문제가 발견되면 심리상담을 받고 감정일기를 씁니다. 일루즈는 이런 자아에 대한 치료 담론이 ‘건강’이라는 막연한 이상을 기준으로 평범한 상태를 병리로 편입시킨다고 주장합니다.

정신분석학적 자아는 끊임없이 정상성을 지향하는 존재입니다. 모두가 자기 자아의 주인이 되면서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 자유는 ‘개척해야 한다’는 숙제이기도 합니다. 자유로운 자아실현이라는 이상은 그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꾸었습니다. 삶의 불행은 자기 내면을 제대로 이해하고 관리하지 못한 결과로 해석됩니다. 자아를 실현해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치료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프로이트의 유산은 우리가 우리 집의 완전한 주인이라는 것이다. 단 여기에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곧 우리 집이 활활 타고 있을 때도, 아니 우리 집이 활활 타고 있을 때에 특히, 우리는 우리 집의 주인이다.” ―‘감정 자본주의’, 에바 일루즈

우리는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제하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해결할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의 연구자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고통스럽게 자아를 찾아 헤매는 사람은 쉽게 볼 수 있지만 마침내 자아를 발견하고 구원에 도달했다는 사람은 희귀합니다.

 

극복 대상이 된 자아의 비극

 

철학자 한병철은 자아를 관리해야 한다는 의무가 어떻게 자기 착취로 이어지는지를 ‘성과주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성과주체에게 자아는 불안의 장소입니다. 이 불안은 타인의 강압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긍정의 과잉이 만들어낸 불안입니다.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를 지게 된 개인은 끊임없이 자기를 착취합니다. 이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입니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기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더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피로사회’, 한병철

사르트르는 “경청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학생은 경청하는 학생 연기를 하느라 진을 뺀 나머지 결국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연구자가 되어 끊임없이 자신을 관찰하고, 감정을 분석하고, 상처 입은 자아를 치유하려 합니다. 그러나 자기 연구에 몰두할수록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잊혀갑니다.

생각해보면 기이한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충분히 이해한 뒤에야 비로소 나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악보를 완벽하게 이해해야만 연주를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정주식 팟캐스트 ‘발굴독서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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