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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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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라는 무한 게임, 승리는 누구에게 의존하는가?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으로 읽는 월드컵과 선거
등록 2026-07-09 17:04 수정 2026-07-15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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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형 인공지능(AI) 제미나이에 ‘‘깍두기’를 끼워서 노는 한국 어린이들의 놀이 문화를 묘사하는 연필 스케치 일러스트를 그려달라’는 지시어를 입력해 만든 그림.

생성형 인공지능(AI) 제미나이에 ‘‘깍두기’를 끼워서 노는 한국 어린이들의 놀이 문화를 묘사하는 연필 스케치 일러스트를 그려달라’는 지시어를 입력해 만든 그림.


북중미 월드컵이 한창입니다. 2026년 7월20일이면 어떤 팀이 우승의 영광을 누리고 트로피를 가져가겠지요. 지금까지 월드컵에서 22개의 우승팀이 탄생했고 우리는 펠레와 마라도나 같은 영웅들을 기억합니다. 만약 축구라는 스포츠가 월드컵 개최 10년 만에 사라졌다면 우리는 초창기 영웅들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은 축구가 계속되기 때문에 영웅입니다.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던 골목길의 발명품

 

제임스 P. 카스의 신비로운 저서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노상미 옮김, 마인드빌딩 펴냄)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게임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는 유한 게임, 다른 하나는 무한 게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유한 게임은 승리를 목적으로, 무한 게임은 게임 자체의 지속을 목적으로 한다.”

월드컵은 승자를 가리는 유한 게임입니다. 반면 축구는 새로운 선수와 팬을 맞이하며 계속되는 무한 게임입니다. 월드컵의 우승도, 월드컵의 영웅들도 축구라는 무한 게임이 계속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말하자면 월드컵은 축구라는 무한 게임 안에 속한 유한 게임입니다.

저자는 이 단순한 구분 하나로 책 한 권을 밀고 나갑니다. 이 책은 100개의 아름다운 절로 구성됐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 여백은 독자가 스스로 사색하며 채워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무한 게임입니다.

유한 게임에는 모두가 똑같이 따르는 고정된 규칙이 존재합니다. 누가 이겼는지 합의하기 위해, 경기를 종료시키기 위해 규칙이 존재합니다. 반면 무한 게임에서는 어느 한 편이 완전히 이기는 것을 막기 위해 규칙이 존재합니다. 무한 게임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언제나 경기를 더 길게 이어갈 방법을 찾습니다. 어느 한 편이 완전히 이겨버릴 위험이 생기면 이를 막기 위해 규칙이 변경됩니다. 무한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게임이 계속되도록 하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게임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이 점이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다. 무한 게임의 규칙은 플레이어들이 어느 유한한 결과, 즉 몇몇 플레이어들이 승리하고 나머지 플레이어들이 패배함으로써 그 게임이 위태로워졌다는 데 동의할 때 바뀐다.”

어릴 적 골목 놀이에서 사용되던 ‘깍두기’라는 제도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집 앞 골목에는 나이도 성별도 다른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다방구니 나이먹기니 하는 게임을 하며 놀았습니다. 깍두기는 너무 어리거나 약한 아이를 양쪽 팀 모두가 자기편처럼 끼워주는 규칙입니다. 동네마다 놀이 규칙은 조금씩 달랐지만 깍두기는 어느 동네에나 존재했습니다. 깍두기가 되어본 사람이라면 그 미묘하게 서글프면서도 다정한 위치가 주는 느낌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깍두기의 세계에서 승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면 약한 플레이어를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골목에서는 그런 룰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쪽이 세 보이면 깍두기를 기꺼이 상대편에 내주었습니다. 누구도 계속되는 승리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놀이가 아니었으니까요.

깍두기가 있으므로 해서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이기지 않게 됩니다. 또 깍두기가 됨으로써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게임 참여가 가능해집니다. 말하자면 깍두기는 유한 게임을 무한 게임으로 만들려는 시도였습니다.

 

패배자가 있어야 민주주의가 계속된다

 

“만일 게임 시작 전에 이길 힘이 충분하다고 한다면, 뒤이어 벌어지는 것은 전혀 게임이라 볼 수 없다.”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승리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같은 평범한 교훈이 아닙니다. 카스의 관심사는 우리의 모든 유한 게임을 어떻게 무한 게임 안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게임 종류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카스는 많은 사람이 무한 게임을 유한 게임처럼 착각하면서 삶을 망친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갈수록 격렬해지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어떻게 민주주의의 틀 안에 두고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무한 게임이 있습니다. 이 게임은 한 세력의 전면적 승리를 방지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권력분립, 사법부의 독립, 언론의 자유, 임기 제한은 승자가 패자를 영원히 게임 밖으로 밀어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세부 규칙입니다. 이 규칙에는 선거가 포함됩니다. 선거는 시작과 끝,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는 유한 게임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민주주의를 선거라는 유한 게임으로 오해합니다. 눈앞의 게임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에 둘을 혼동하지요. 한국의 많은 정치인은 민주주의를 끝이 있는 유한 게임처럼 취급합니다. 자기들은 50년, 100년 집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상대 쪽은 ‘제로’가 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들은 애국세력이고 상대는 반국가세력이라고 합니다. 민주주의라는 게임 안에서 전면적 승리를 바라는 것은 규칙 위반입니다. 상대 플레이어를 부정하면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타이틀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카스는 우리가 서로를 타이틀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를 때 게임은 계속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월드컵 우승팀이 트로피를 가져가듯, 선거라는 유한 게임의 승자는 타이틀(대통령, 국회의원)을 가져갑니다. 타이틀은 연극적이어서 그것을 존중할 관객을 필요로 합니다. 월드컵 우승팀에는 자신들이 힘들게 따낸 트로피를 존중할 패배자들이 필요합니다. 선거의 승자에게는 결과에 승복할 패배자가 필요합니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재검표 논란 끝에 패배한 앨 고어 후보는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승복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민주주의라는 무한 게임의 기본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어는 상대 후보였던 조지 부시를 위해 승복한 게 아닙니다. 민주주의라는 게임 자체를 위해 승복했습니다. 고어가 끝내 승복하지 않았다면 부시의 임기는 시작부터 정당성 논쟁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승리의 타이틀이라는 것은 이처럼 그 승리를 존중하는 패배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비치볼 놀이에서 강스파이크를 때리는 정치

 

“우리는 인정받은 타이틀을 소유해야만 강력해질 수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의례적인 존중을 통해서만 강력해질 수 있는 것이다. 힘은 결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 나는 오직 다른 사람들이 주는 힘만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유한 게임이 상대가 받을 수 없는 공을 보내서 득점하는 게임이라면, 무한 게임은 친구들끼리 공을 계속 공중에 띄워놓는 놀이와 가깝습니다. 해변에서 친구들끼리 비치볼 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강스파이크를 내리꽂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많은 정치인이 그런 눈치 없는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정치가 작동하는 배경에는 이 게임을 끝내야 한다(끝낼 수 있다)는 독특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쪽 세력만 사라지면 모든 근심이 사라질 거라는 생각, 우리가 계속 집권하면 나라가 잘될 거라는 생각은 일종의 역사 종언적 사고입니다. 카스는 이런 사고방식이 유한 게임이 무한 게임 속에 있음을 망각한 상태에서 생겨난다고 지적합니다.

“역사는 정리될 수 있고, 합리적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숭고한 믿음에서 악이 생긴다. 시온으로 돌아가면,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하면, 혹은 살아 있는 모든 이교도들을 이슬람교도로 개종시키면 역사는 끝나리라고 여기는 것이 악이다.”

깍두기는 한국 골목의 위대한 발명품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깍두기를 만든 그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사회를 만들었나 하는 점입니다. 어떻게든 상대를 끼워주려고 했던 다정한 사람들이 이제는 상대를 게임 밖으로 밀어내려고 안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게임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갈수록 부정선거 음모론이 기승을 부리는 데는 승자에 대한 인정 거부 심리가 자리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패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정치인들이 자꾸 동의하고 싶지 않게 하는 정치를 하니까요. 모든 악은 악을 제거하려는 욕망에서 생겨난다는 카스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다시 선거를 하는가

 

지나간 월드컵의 영웅들은 월드컵이 계속될 때만 영웅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게임의 반복 가능성은 위대한 영웅들이 기억되는 이유이자, 새로운 영웅을 기다릴 수 있는 이유입니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상대 플레이어의 인정과 게임의 반복 가능성, 민주주의는 이 두 조건 위에서만 작동됩니다. 민주주의는 영원한 승자를 만드는 제도가 아니라, 영원히 승자를 바꿀 수 있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승자를 위한 예의가 아니라 게임 자체를 지키는 행위가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계속하기 위해 선거를 합니다.

 

정주식 팟캐스트 ‘발굴독서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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