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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을 구한 이야기가 숨기는 것들

‘라이언 일병 구하기’식 리얼리즘, 부조리한 죽음과 전쟁의 리얼리티를 지우다
등록 2026-04-16 19:51 수정 2026-04-17 15:05
이란 서부 이스파한에서 격추된 미군 헬기 잔해라며 2026년 4월5일 소셜미디어에 공유된 항공기 기체와 프로펠러 모습. 이미지 분석 전문가인 윌리엄 굿하인드는 로이터 통신에 사진 속 프로펠러가 미군 대형 수송기 C-130 계열과 일치한다고 분석했다. 이란군은 이날 이 지역에서 F-15 조종사를 구출하려는 미군과 교전해 C-130 1대, 블랙호크 헬리콥터 2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Reuters 연합뉴스

이란 서부 이스파한에서 격추된 미군 헬기 잔해라며 2026년 4월5일 소셜미디어에 공유된 항공기 기체와 프로펠러 모습. 이미지 분석 전문가인 윌리엄 굿하인드는 로이터 통신에 사진 속 프로펠러가 미군 대형 수송기 C-130 계열과 일치한다고 분석했다. 이란군은 이날 이 지역에서 F-15 조종사를 구출하려는 미군과 교전해 C-130 1대, 블랙호크 헬리콥터 2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Reuters 연합뉴스


“우리가 그를 구했다!”

2026년 4월5일 새벽,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비상탈출한 전투기 조종사의 구출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란은 자국 영공에서 미군 F-15 전투기가 피격되자 조종사 생포에 6만달러의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미군은 수십 대의 항공기와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조종사 구조에 성공했습니다. 영화 같은 구출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전쟁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공습에서 살아 돌아온 조종사 이야기가 공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덮어버린 풍경을 보면서, 우리가 ‘이야기’에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 실감합니다.

 

전쟁의 재현 아닌 ‘전쟁의 부인’

 

한 명의 군인을 구하기 위해 적의 포화 속을 뚫고 들어간 무모한 작전. 바로 한 영화가 떠오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쟁 영화입니다. 어머니에게 아들을 돌려주라는 명령을 내린 국가와 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진 대원들, 그리고 전우들을 떠날 수 없어서 구조를 거부한 병사. 얼핏 이 영화는 온통 인류애로 가득한 것처럼 보입니다.

탈식민주의 연구자 오카 마리는 ‘기억·서사’(김병구 옮김, 교유서가 펴냄, 2024)에서 이 영화가 전쟁을 재현하는 방식을 날카롭게 비평합니다. 오카는 이 영화에 구현된 ‘리얼리즘’은 전쟁의 재현이 아닌 ‘전쟁의 부인’이라고 말합니다.

오카 마리의 ‘기억·서사’ 표지

오카 마리의 ‘기억·서사’ 표지


영화 초반부에 이 작전은 부조리하게 느껴집니다. 구출 과정에서 더 많은 병사가 죽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그럼에도 전쟁 지휘부는 라이언 일병을 반드시 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아들을 모두 잃은 어머니의 슬픔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진실로 걱정했던 것은 어머니의 슬픔 자체가 아닙니다. 진짜 걱정거리는 그 소식이 일으킬 반전 여론이었습니다. 이 전쟁을 지속하려면 어머니에게 아직 살아 있는 아들만이라도 구해 돌려줘야 합니다. 이제 라이언 일병은 단순한 한 명의 병사가 아닙니다.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구할 가치가 있는 전략자산으로 전환됩니다. 이 명령에는 조리가 있습니다.

구조대원들은 전장에서 사투를 벌인 끝에 라이언 일병을 만납니다. 그런데 라이언은 구조되기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들을 버리고 혼자 전장에서 이탈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라이언을 설득하지 못한 대원들은 그의 부대원들을 도와 밀려오는 적군과 일전을 치릅니다. 이 전투에서 누군가는 살아남았고 누군가는 죽었습니다. 누가 죽고 살았는지는 우연일 뿐입니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졌습니다. 관객들은 안도합니다. 희생된 구조대원들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의해 부조리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적어도 지킬 만한 의미가 있는 청년을 구하려다가 죽은 것입니다.

영화는 죽음을 의미 있게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바로 그 성공 때문에 관객은 더 이상 그 죽음이 왜 발생했는지 묻지 않게 됩니다. 오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서사가 시사하는 것은 사람에게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은 단지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유 없이 죽는다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스틸컷. 와이드 릴리즈㈜ 제공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스틸컷. 와이드 릴리즈㈜ 제공


 

살아 돌아온 생명이 더 많은 죽음 부르는 역설

 

전쟁이란 본래 인간이 이유 없이, 부조리하게 죽는 세계입니다. 인간의 주체적 선택이 근원적으로 부정된 세계입니다. 그런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재현된 인물들은 삶도 죽음도 주체적으로 선택합니다. 라이언 일병도, 구조대원들도 결국 자기 의지에 따라 목숨을 겁니다. 이 영화의 ‘리얼리즘’이 부인하는 것은 전쟁이란 사람을 부조리하게 죽게 하는 사건이라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구출된 조종사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이 사건은 영화 같은 ‘리얼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영화에서나 봤던 특수부대와 첨단 장비가 시시각각 어떻게 움직였는지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언론이 이 사건을 생생하게 보도할수록 사람들은 전쟁의 현실과는 점점 멀어집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부인’의 성격을 띠고 있으니까요. 이 전쟁으로 지금까지 5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들을 구할 하나하나의 특수작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리얼한’ 이야기는 가장 비현실적입니다.

이 작전에서 미군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서사를 그대로 반복합니다. “우리 병사 한 명의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신조의 실천입니다. 이 신조에서 ‘우리 병사’가 아닌 존재들은 자동으로 ‘무엇’의 자리로 밀려납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들뜬 표정으로 조종사 구출 ‘미담’을 발표한 장면은 이 전쟁의 가장 생생한 부조리입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수천수만 명이 죽는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보편적 인류애와는 거리가 먼, 특정 방향으로만 열려 있는 차가운 윤리입니다. 공습에서 살아 돌아온 조종사의 이야기는 중요하지만 매일 공습으로 죽어가는 민간인과 적군의 이야기는 무시해도 좋습니다. 이 서사 안에서 그 사람들은 구조될 대상이 아니라,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 됩니다. ‘우리 병사’의 생명이 절대화될수록 그 바깥의 생명은 계산 가능한 ‘무엇’으로 환원됩니다.

미군은 이번 작전에서 6천억원대의 장비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조종사 구출 소식으로 반전 여론을 돌려세운다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전쟁 동력을 획득하게 됩니다. 조종사 구출 소식에 자신감을 얻은 트럼프 대통령은 곧장 “발전소와 교량 등을 폭격하겠다”며 욕설을 섞어 위협했습니다. 살아 돌아온 생명이 더 많은 죽음을 불러오는 이 아이러니는 오카가 말한 ‘전쟁의 부인’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탁되는 전쟁의 거대한 폭력 구조

 

조종사의 생환 소식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 뒤에 가려진 슬픔은 없는지도 함께 생각해봐야 합니다. 한 명을 구한 이야기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구조를 윤리적으로 세탁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개인을 구원한 의미가 ‘이야기'로 확장되는 순간 다른 이의 죽음을 정당화하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하임은 나치 절멸수용소의 한 생존 여성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신에게 남겨진 삶을 더욱 바람직하게 살아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했습니다. 베텔하임은 그런 사명 따위란 없다고 말합니다. 살아남은 사람이 사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면 죽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사명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 됩니다. 베텔하임은 이런 식으로 생존과 죽음에 거짓된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 부조리를 낳은 폭력의 근원도 계속 소생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조종사 구출 소식을 전하며 “미국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우리 군대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이라는 말로 끝맺었습니다. 사망한 이란 지도자 알리 후세인 하메네이 역시 “신의 가호”를 입버릇처럼 이야기했습니다. 신을 들먹이는 것은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입니다. 둘 다 틀렸습니다. 어느 쪽에도 신의 가호 같은 것은 없습니다.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에서 바다에 빠져 죽은 해적을 보며 캉디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세요. 때로는 죄가 벌을 받습니다.” 마르틴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도 함께 죽어야만 했을까요?” 이 우화의 교훈은 부조리한 죽음을 조리 있게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카가 ‘기억·서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어떤 의미로도 사건의 폭력성을 합리화하지 말라는 윤리적 요청입니다.

의미 없는 죽음은 인간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러나 전쟁이란 본래 인간이 부조리하게 죽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죽음의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신, 정의, 조국, 민족…. 이름은 다르지만 기능은 같습니다. 전쟁의 속살을 보려면 이 의미들을 지워내야 합니다. 무의미한 죽음을 직시한 사람은 그런 죽음을 만들어내는 전쟁에 도저히 찬성할 수 없습니다. 이보다 강력한 반전 논리는 없습니다.

 

그 조종사는 무슨 임무를 수행하다 격추됐나

 

조종사 구출 소식에 가슴이 뛰었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한 생명이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문제는 그 감동이 어디로 흘러가느냐입니다. 감동은 질문을 멈추게 합니다. 그 조종사가 무슨 임무를 수행하다 격추됐는지 묻지 않게 하고, 같은 시각 폭격으로 죽어간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게 합니다. 이야기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동시에,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실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사실이 두 번째 사실을 지워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주식 팟캐스트 ‘발굴독서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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