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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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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판 기웃거리던 단역배우 “나를 죽여달라”

‘죽음은 삶의 해소인가?’ 질문 던지는 미국 최초의 실존주의 소설 ‘그들은 말을 쏘았다’
등록 2025-09-04 22:12 수정 2025-09-10 19:33
시드니 폴락 감독의 1969년 영화 ‘그들은 말을 쏘았다’의 한 장면. 할리우드 영화판을 기웃거리며 살아가는 남녀 주인공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하게 다르다. 이혼과 근친 성폭력 등 비참한 삶을 살아온 여성 글로리아는 갈수록 죽고 싶은 생각에 이른다. 출처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시드니 폴락 감독의 1969년 영화 ‘그들은 말을 쏘았다’의 한 장면. 할리우드 영화판을 기웃거리며 살아가는 남녀 주인공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하게 다르다. 이혼과 근친 성폭력 등 비참한 삶을 살아온 여성 글로리아는 갈수록 죽고 싶은 생각에 이른다. 출처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진실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자살이다” — ‘시시포스 신화’ 알베르 카뮈

삶과 죽음 중 어느 쪽이 나은지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이 문제가 구체적인 요청으로 다가온다면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누군가가 정중히 “나를 죽여달라”고 부탁한다면? 호레이스 맥코이의 소설 ‘그들은 말을 쏘았다’(송예슬 옮김, 레인보우퍼블릭북스 펴냄)는 이 곤란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미국. 단역배우를 전전하던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댄스마라톤 대회에 참가합니다. 댄스마라톤은 다른 참가자들이 모두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춤추는 커플에게 우승 상금을 주는 대회입니다. 1시간50분 춤춘 뒤 10분 휴식하고 다시 춤춥니다. 어떤 춤이라도 상관없지만 춤을 멈추면 탈락합니다. 관객은 참가자들의 우스꽝스러운 경연을 재미 삼아 구경하고 주최 쪽은 돈을 법니다. 여주인공의 말을 빌리자면 참가자들은 동물원 원숭이 신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상금을 노리고 참가합니다. 참가자 중에는 도주 중인 살인자도 있고 가출한 미성년자도 있습니다. 이 기괴한 대회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여기 참여한 두 주인공의 심리상태는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레인보우퍼블릭북스가 2020년 펴낸 호레이스 맥코이의 소설 ‘그들은 말을 쏘았다’ 한국어판 표지.

레인보우퍼블릭북스가 2020년 펴낸 호레이스 맥코이의 소설 ‘그들은 말을 쏘았다’ 한국어판 표지.


다리 부러진 말에 총을 쏜 것처럼

남녀 주인공 글로리아와 로버트는 할리우드 영화판 주변을 기웃거리며 힘겹게 살아가는 청춘입니다. 비슷한 처지라 말이 잘 통할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삶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확연하게 다릅니다. 로버트는 잠들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감독이 되어 사하라사막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꿈을 꿉니다. 그 희망 하나로 팍팍한 하루하루를 견뎌냅니다. 반면 글로리아는 그저 죽고 싶습니다. 경주에서 승리해도, 후원자가 나타나도 머릿속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대회가 파국으로 치닫고 글로리아의 죽음 충동도 절정에 이릅니다. “가면 갈수록 죽고 싶은 생각뿐이에요.” 로버트가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 묻습니다. 글로리아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권총을 꺼냅니다. “쏴요. 이 고통을 끝낼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이 순간, 로버트는 어릴 적 할아버지 농장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벨리 다리가 부러졌어.” 할아버지는 쓰러진 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이놈이 구멍에 발을 헛디뎌서 그만.” 할머니가 로버트의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고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날 밤 얘기해주었습니다. “그놈을 위해서 그런 거야. 가망이 없었으니까. 고통을 끝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어디를 쏠까요?” 로버트가 물었습니다. “여기, 관자놀이에다가.” 글로리아가 답했습니다. 로버트는 총을 쏘고 바다에 총을 던졌습니다. 경찰관이 묻습니다. “왜 그 여자를 죽였어?” “내게 부탁해서요.” “참 친절한 새끼네.” 경찰관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게 다라고?” “사람들은 말을 쏘잖아요. 안 그래요?”

우리는 말이 죽고 싶어 했는지 어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글로리아는 자기 의사를 정확히 표현했습니다. 로버트는 “그녀의 눈과 입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쏴도 될까요? 말을 쏘는 것과 사람을 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지, 우리의 윤리적 거부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의문이 남습니다.

말과 사람의 목숨 무게가 같을까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들은 말을 쏘았다’를 가리켜 “미국에서 탄생한 최초의 실존주의 소설”이라고 말했습니다. 글로리아를 ‘돕는’ 순간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린 작가는 실존주의의 심연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주인공은 우리에게 삶이 좋은지 죽음이 좋은지 묻습니다. 삶과 죽음을 제대로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살아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할 뿐이죠. 이에 관해 글로리아는 명확한 답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은 삶(고통)의 해소라는 겁니다. 글로리아의 비관은 급기야 본인의 삶을 넘어 인류 전체를 향합니다. “당신도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걸요?” “나도 다른 사람들도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로버트는 희망을 미래로 미루며 살아가는 인간의 표본입니다. 삶이란 더 나아지는 여정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미래를 생각하며 기회를 엿봅니다.

삶이란 죽음이 전제된 것입니다. 죽음에는 삶이 전제돼 있습니다. 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한 우리 실존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보통은 그냥 삽니다. 뭘 그런 걸 미리 생각하나요. 마르틴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그렇게 사는 것은 문제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모른 체하고 사는 삶은 본래적인 삶이 아니라고요. 죽음을 앞당겨 마주한 사람만이 충실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그런데 글로리아는 죽음을 사유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상실한 인간입니다. 글로리아의 비관은 죽음을 직시한다고 해서 반드시 삶이 충실해지지 않는다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죽고 싶어요. 신이 내 목숨을 거둬가면 좋겠어요.”

“여기서 잘 먹고 잘 자고 있잖아요.”

“언젠가 일어날 일을 미루고 있는 것뿐인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삶과 죽음 사이의 부조리를 간파한 알베르 카뮈는 인간에게는 오로지 자살만이 의미 있는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죽음의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자살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처절하게 설득했습니다. 운명에 반항하는 열정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지만 글로리아처럼 힘차게 생각할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력한 처방입니다. 쇠렌 키르케고르도 “왈츠를 출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삶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왈츠도 두 다리로 일어설 힘이 있는 사람이 출 수 있습니다.

자살과 관련해 가장 독특한 의견을 낸 사람은 아마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일 겁니다. 그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하면서도 이왕에 태어났으면 죽지 말고 잘 살라고 합니다. 우리는 개체이기 이전에 전체이기 때문에 자살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살에 성공한다 해도 인류 전체의 고통이 그대로 남아 있기에 너 혼자 죽어봐야 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며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글로리아는 이들에게 묻습니다. 당신들이 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아느냐고요.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만 죽어본 사람은 없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만이 말을 할 수 있죠. 이 위대한 철학자들은 보편적 삶의 고통에 관해 조언하지만 고통의 주관성에 관해서는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비정한 소설은 우리를 로버트의 자리에 세웁니다. 로버트는 글로리아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로버트였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요. 거시적 차원에서 타인의 고통을 구경하는 사회를 규탄할 수도 있습니다. 병리적 차원에서 당장 병원에 데려가 우울증 상담을 받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삶의 비관을 일종의 증세로 바라보는 것은 이 시대의 독특한 ‘증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글로리아의 단호하고 일관된 주장에 귀 기울여본다면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는 그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드니 폴락 감독의 1969년 영화 ‘그들은 말을 쏘았다’의 한 장면. 글로리아(왼쪽)는 로버트에게 권총으로 고통을 끝내달라 한다. 출처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시드니 폴락 감독의 1969년 영화 ‘그들은 말을 쏘았다’의 한 장면. 글로리아(왼쪽)는 로버트에게 권총으로 고통을 끝내달라 한다. 출처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이해하지 못할 절망의 깊이

저는 순댓국을 못 먹습니다. 아무리 잘한다는 집을 가봐도 특유의 냄새 때문에 먹을 수가 없습니다. 남들처럼 맛있게 먹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큰맘 먹고 숟가락을 들어보지만 역시나 포기하고 맙니다. 글로리아에게 삶이란 저의 순댓국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처럼 즐기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것, 아무리 다시 시도해도 불가능한 것. 글로리아에게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타인의 절망 앞에서 우리는 어떤 윤리를 선택할 수 있을까요. 로버트는 글로리아의 고통을 끝내주었지만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로버트가 글로리아의 요청을 들어준 것이 체념이었는지 용기였는지 무력감이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합니다. 다만 로버트는 글로리아의 고통을 자신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이해했습니다. 의사가 글로리아의 몸을 매일 진찰했지만 청진기로는 그녀의 고통이 무엇인지 진단할 수 없었습니다. 로버트는 글로리아가 가진 절망의 깊이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이해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글로리아에게 설득당했죠. 저는 이것이 삶이 나은가 죽음이 나은가 하는 것보다 중요한 실존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삶이 모두에게 ‘같은 맛’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의 결말이 아니라 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글로리아의 고통은 나의 고통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이 아니었을까요. 로버트는 글로리아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했지만 진정으로 이해받은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고통의 주관성을 알게 될수록 글로리아는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로버트는 글로리아의 고통과 함께 회복 가능성마저 동시에 제거했습니다. 순댓국을 못 먹는 사람에게도 다른 음식이 있듯이, 글로리아에게도 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성으로 존재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그랬는지 어땠는지 물을 수 없습니다. 글로리아는 죽어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삶은 순댓국처럼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고통과 함께

글로리아의 절망이 진실했듯 삶의 가능성 또한 진실입니다. 상대의 절망을 진실로 인정하면서도 희망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것. 이 소설은 로버트가 하지 못한 일을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 아닐까요. 두 진실 사이의 긴장을 견디며 더 책임감 있는 윤리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말을 쏘았다’는 서로 다른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텍스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로버트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정주식 칼럼니스트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좋은 책은 나를 곤란하게 한다. 나를 곤란하게 하는 책 이야기.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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