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붓던 비가 그치고 해가 난다. 날이 푹푹 찐다. 달아오른 공기 속 물방울이 보이는 거 같다. 장마가 시작됐다.
텃밭 농사꾼에게 장마는 봄철 농사가 마무리됐음을 뜻한다. 이르게는 2월 말에서 3월 초 거름을 넣고 밭을 만드는 것으로 봄철 농사를 시작한다. 봄 농사는 흔히 ‘게을러야 한다’고 한다. 날이 풀려야 작물이 버틸 온도가 되고 때가 돼 심어야 잘 자라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부지런을 떨었다간 늦서리에 심어놓은 모종이 제명을 다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지난해 봄 농사를 시작할 무렵엔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분주했다. 10여 년째 텃밭의 대소사를 도맡아온 ‘밭장’도 여러모로 농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잎채소는 부실했고 열매채소는 부족했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잡아주지 않은 풀이 어른 키만큼 자라 엉망이 된 밭을 가을 농사 시작 무렵에야 예초기를 동원해 간신히 정리했다.
올핸 달랐다. 겨울이 채 가기 전부터 자주 만나 막걸릿잔 기울이며 심기일전을 다짐했다. 일찌감치 밭을 만들고 차근차근 씨를 뿌리고 모종을 냈다. 상추 등 쌈채소 모종을 2주 간격으로 세 고랑이나 심었다. 또 한 고랑엔 ‘모둠 쌈채소’ 씨앗 한 봉지를 뿌렸다.
지난 4월 말께 첫 수확을 시작해 6월 말까지 두 달간 물리도록 쌈을 즐겼다. 지난 주말 웃자라 쌉쌀해진 쌈채소 한 고랑을 정리했고, 남은 고랑도 다가오는 주말 정리하기로 했다. 쌈 외에 고수, 쑥갓, 아욱 등 다른 잎채소도 풍성했다. 반 고랑 나마 처음 뿌려본 양배추는 결구(속이 차 포기가 됨)에 실패했지만, 여린 잎 자체로 큰 기쁨을 줬다.
지난해 소홀했던 열매채소도 올핸 다양하게 심었다. 고추는 맵기 정도를 달리하는 것과 멸치와 볶아 먹을 꽈리고추까지 네 종류를 두 고랑 심었다. 한 고랑 심은 가지는 지난주 첫 수확을 했다. 잘 자란 키에 줄기도 나무처럼 단단해져 이대로만 유지하면 찬 바람 불 때까지 수확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수확을 시작하지 못한 방울토마토는 초록빛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 기대감을 키운다. 고추·가지·토마토는 모두 ‘가지과 작물’이란 공통점이 있다. 연작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은 언젠가부터 덩굴 채소와 한 해씩 돌려 심고 있다.
잘될 때는 뭐 하나 빠지지 않는다. 올핸 덩굴 채소도 기가 막히게 컸다. 오이는 벌써 3주째 수확했는데, “팔아도 되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2주 전 수확을 시작한 조선호박은 잎은 쪄 쌈으로, 열매는 숭숭 썬 뒤 새우젓을 곁들여 볶음으로 즐기고 있다. 오이와 호박 곁엔 2m 넘게 세워준 철제 지주대를 타고 작두콩이 씩씩하게 줄기를 뻗고 있다.
오랜만에 뿌린 옥수수 씨앗은 100%에 가까운 발아율을 뽐냈다. 어느새 어른 키보다 크게 자랐고 줄기도 500원짜리 동전만큼 굵어졌다. 아직 꽃대가 올라오지 않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주말농장의 ‘랜드마크’ 노릇만으로도 종잣값은 너끈하다.
장마가 시작됐으니 잎채소는 끝물이다. 병해만 피한다면 열매채소는 가을까지 버텨줄 터다. 올봄 농사, 이만하면 됐다.
##경기 고양 편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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